국내에서 40대 프로골퍼는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할 시기입니다. 게다가 우승 한번 하지 못 한 경우라면 당장이라도 관두고 싶은 마음이 요동칠 겁니다. 대회에 나가면 20, 30대 젊은 후배들에게 밀리기 일쑤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생계를 위해 차라리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재호(우성종합건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데뷔 후 18년 동안 209개 대회에 우승이 없던 그가 마침내 43세의 나이로 첫 우승을 올린 뒤 눈물을 쏟았습니다.

  꺾이지 않는 의지를 지킬 수 있었던 데는 프로야구 '미스터 올스타'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김재호의 아버지는 김용희 롯데 퓨처스(2군) 감독(70)입니다. 김재호는 "골프를 시작한 이후 항상 묵묵히 지켜봐 주신 아버지의 노력과 희생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버지로서 운동선수 선배로서 존경한다"라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2013년 12월 결혼한 김재호는 이날 응원 온 아내, 딸과 기쁨을 함께 나눴습니다. 

  김용희 감독은 평소 아들에게 "계속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포기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해라. 야구 선수들은 골프 선수보다 더 열심히 한다. 다른 선수들보다 더 열심히 하라"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재호는 2일 경기 여주시 페럼클럽에서 끝난 KPGA 투어 렉서스 마스터즈(총상금 10억 원)에서 최종 합계 2언더파 286타를 기록해 황중곤, 이유석, 최진호와 동타를 이뤘습니다. 연장 첫 홀인 18번 홀(파5)에서 세 번째 샷을 홀 바로 옆으로 보낸 김재호는 유일하게 버디를 낚았습니다. 우승 상금 2억 원입니다.

  이날 16번 홀(파3)에서는 선수들이 직접 선정한 배경 음악과 함께 팬들 앞에 입장할 수 있는 이벤트가 진행됐습니다. 김재호는 이때 롯데 응원가를 틀고 한때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은 '99번 김용희'가 새겨진 롯데 유니폼 상의를 입고 나와 팬들의 힘찬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며 김재호는 오랜 소망 한 가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부자(父子)가 모두 우승을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1984년 롯데 우승 멤버였던 아버지는 1992년 롯데 타격 코치로 우승 반지를 낀 적이 있습니다. 늘 '김용희의 아들'로 불린 김재호였기에 자신도 챔피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날 비로소 현실로 만든 겁니다. 김재호는 "투어 생활을 하면서 항상 바랐던 것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승하는 것이었다. 그날이 오면 정말 영광스러울 것 같았다. 아버지가 정말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재호는 "우승은 전혀 생각지도 못해서 소감도 준비를 못 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유니폼을 입은 데 대해서 그는 "원래 그런 것을 못 하는 성격인데, 대회 주최 측에서 (이벤트 관련) 준비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나이는 많지만, 캐릭터가 특별히 없어서 그런 '낭만 캐릭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상의해 결정했다. 내가 유니폼을 갖고 나온 걸 아버지도 모르셨을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김재호의 탄생은 신문 뉴스에도 장식될 만큼 김용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당시 보도를 보면 '야구선수 김용희 씨 첫아들 낳아 싱글벙글'이라며 '프로야구 김용희 선수(26)가 부산에서 스프링 캠프 중 첫아들을 얻어 축하 인사 받기 바쁘다. 결혼한 지 1년 5개월 만에 아버지가 됐는데 훈련에도 더욱 힘이 솟는다'라고 돼 있습니다. 

  김재호는 43세 9개월 4일로 첫 우승을 신고해 KPGA 투어 역대 최고령 첫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부문 종전기록은 1958년 연덕춘의 42세 4개월 첫 승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KPGA 투어에서 만 40세 이후에 첫 우승을 달성한 것은 김재호가 통산 8번째일 만큼 '늦깎이 우승'이 됐습니다. 40대 우승자가 나온 건 2017년 '카이도시리즈 유진그룹/올포유 전남오픈 with 무안CC'에서 김성용(41세 2개월 15일) 이후 8년 만입니다. 

   김재호는 "집중력이 한 번씩 흐트러지는 경우가 요즘 늘어나서 자신감도 떨어졌다"라며 "주위에서 '자신 있게 쳐라.'라는 조언도 해주셨지만, 오히려 더 잘 안되더라. 이번 대회는 코스도 어렵고, 최근 제 샷도 좀 안 좋아서 긴장과 걱정 속에서 샷을 한 것이 부드러운 스윙으로 이어진 것 같다"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김재호는 2003년 KPGA 투어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프로야구선수 2세가 프로골프 테스트를 통과한 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김재호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건 야구 때문입니다. 1993년 김용희 감독이 미국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을 때 초등학생이던 김재호가 카트를 운전하는 재미로 골프장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다 골프의 매력에 빠져 부산 내성중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클럽을 잡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뛰어난 운동감각과 파워를 물려받은 그는 부산 대연고 3학년 때인 1999년 세미 프로테스트에 도전해 단번에 합격했습니다. 장타자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처럼 300야드를 가볍게 넘기는 드라이버샷이 강점이었습니다. 김용희 감독의 핸디캡은 10으로 알려졌습니다.

190cm인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181cm의 준수한 키에 유연한 몸을 앞세운 장타를 앞세워 KPGA 투어까지 입회했지만 좀처럼 우승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2012년부터 2023년까지 비록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꾸준히 상금 순위 40, 50위권에 머물려 시드를 유지하다가 지난해 팔꿈치 부상으로 1년 병가를 낸 뒤 올해 복귀했습니다.

  김재호의 종전 최고 성적은 2012년 KPGA 선수권 공동 2위와 2019년 DB손해보험 프로미 오픈 준우승이었습니다. 올해는 5월 GS칼텍스 매경 오픈 공동 10위가 최상이었습니다.

  이번 우승은 단순한 개인의 성취를 넘어 늦깎이 선수들에게도 깊은 울림과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김재호는 "죽을 때까지 골프 선수로 남고 싶다"라는 각오를 밝히며, 아버지의 응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의 우승은 골프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자, 가족의 사랑과 인내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결실이었습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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