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넘은 기억이다.
30대의 나이에 들어섰던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에 어느 어린 아가씨가 입사했다.
아가씨라고 하기에도 어려보이는 앳띤 외모,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말수가 적어
어디에 있는지 없는지 파악조차 쉽지 않은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아가씨였다.
키는 160 정도 되었지만 몸무게는 40킬로그램도 안나가는 마른 몸매가
왠지 불치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온갖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드는 순정만화속의 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일하는 부서가 달라 개인적으로 마주칠 일이 없이 지내던 어느날,
내 업무 한가지를 그 아가씨 주연이 맡아 처리해줬다.
나이차도 많고 직장에서도 한참 선배인 내가 개인적으로 친해질 수는 없었고
으레 형식적으로 수고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며칠 뒤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연이라는 이름의 그 여직원과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다.
주연이 가진 매력은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갸녀린 몸매와 갖 태어난 아이와 흡사한 피부였다.
그런 모습에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주연은 최소한 내게 만큼은 하루하루 더욱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주연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매력은
철저한 내숭덩어리였다는 점과
이에 철저하게 상반된 돌발행동을 서슴지 않고 맹랑하게 자행했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품에 안기기도 하고,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차안에서 자신이 먼저 달려들어 키스를 하기도 했다.
모든 애정표현을 위한 행위의 시작은 주연이 도맡아 했으며
한 동작이 끝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전의 내숭 분위기로 돌아감으로써
오히려 알듯모를 신비한 매력을 물씬 풍겼다.
어느 깊은 밤, 차안에서 내 바지를 벗겨 흥분된 내 그것을 그 작은 입속에 모두 담았던 것도
스스로 돌발적으로 한 행동이었고,
먼저 여관을 가자고 앞장서서 카운터에서 돈을 지불하던 사람도 주연이었다.
그러나 10살 차이라는 핸디캡과 직장 후배라는 신분적 차이가 커다란 장애가 되어
차마 육체의 핵심부분이 접선을 이루는, 이른바 '먹었다'고 표현할 수 있는
본격적인 행위는 자제했던 것이 그나마 내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곤 했다.

2.

그런 주연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직장을 그만 두었다.
직장을 그만 두더라도 자주 연락하고 만날 것 같던 주연은 차츰 연락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아쉬운 듯 자주 연락하는 것도
상황을 원상태로 만드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나 역시 인내력으로 버티다 흐지브지 기억속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한 1년쯤 지났을까?
그러던 어느날 주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방이라며 말하는 목소리는 뭔가 모를 비장함이 가득차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니 더 이상 알려하지 말라는 대답 또한 단호했다.
그러면서 내게 돈을 꾸어달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가에게 돈을 꾸어달라는 부탁을 들으면
그것이 누구며 또한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이 부정적인 생각부터 든다.
주연 역시 마찬기지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동안 혼자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몇가지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모두 추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부탁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던 주연이기에
지금의 그 상황이 매우 위급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라는,
다분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도 들었다.

"얼마가 필요한데?"

내가 묻자 주연은 늘 그녀가 그랬듯
맹랑한 목소리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당돌하게 대답했다.

"받지 않아도 될만큼....."

더 이상 물을 이유가 없었다.
계좌번호를 묻고 전화를 끝낸 뒤 사무실 밖에 있는 은행으로 달려가 10만원을 송금했다.
불과 10분 안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뒤로 얼마동안 주연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일은 점점 내게 더 황당함과 허탈함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3.

어느날 저녁 친구 빛나리를 만났다.
이 변태 친구는 불행히도 그 당시에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빛나리에게 주연에 대한 얘기를 하다 10만원 얘기를 꺼냈다.
그것이 마지막 전화였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얘기를 묵묵히 듣던 빛나리가 내게 되물었다.

"너, 걔 먹었냐?"

이 대책없는 변태 녀석은 내가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며 주연과의 관계를 미화시키며
순정적으로 표현했건만 얘기의 핵심은 외면한 채
녀석이 관심있는 대목만 귀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야 임마. 내가 아니라 그랬잖아. 그리고 그 말 물어보라고 내가 긴 얘기했냐?"

녀석에게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표정으로 짜증을 냈다.
하지만 녀석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혼잣말 같은 대답을 이어갔다.

"5만원은 아낄 수 있었는데....."


4.

그 뒤로부터 약 1년뒤 주연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가 온 것이 아니고 당시에 사람들이 이용하던 무선호출기,
이른바 삐삐에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그녀 답지 않게 힘없이 시작된 메시지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었다는,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흉봐달라는,
이른바 3류소설이나 TV 드라마에 기본 옵션처럼 등장하는 상투적 대사였다.
난 주연이 다시 보고 싶은 것 뿐이었지 그런 대사의 세련된 정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주연에게 연락할 방법이 내겐 없었다.
알고 있던 집 전화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고
그녀를 알던 사람에게 그녀의 연락처를 물을 용기도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이미 정상에서 내려와 내리막길을 계속 달리는 이런 인연을
굳이 붙잡을 필요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주연은 기억속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가끔씩 생각이 날 때도 지나간 과거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어떤 방법도
내게 없다고 다짐하며 생각속에 있는 조금의 가능성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5.

그런 주연을 오늘 시내 지하철 안에서 만났다.
10년이 넘게 시간이 지났지만 난 분명히 그녀가 주연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맞은 편에 앉아 핸드폰을 하던 아가씨, 아니 아줌마.
가녀린 몸매는 이미 사라지고 얼굴은 빵빵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만큼 살이 붙었고,
튼튼해 보이는 두 다리도 이젠 자주 아플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살이 찐 얼굴의 형태가 전형적인 주부 스타일인 것으로 보아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고 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잠시 갈등했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하고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을까?
여기서 말을 건네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일까?
아니면 그렇게 힘들게 찾아온 인연인데 또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내려야 하는 역은 바로 다음이고 더욱이 내게는 같은 곳을 가는 일행이 있었다.
잠깐 얘기하기도 입장이 난처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또한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었다.
내가 내려야 하는 역에 도착할 즈음 몸을 일으키며 일어나
내리는 문을 향해 몸을 옮기며 주연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이주연...씨죠?"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대답은 의외다.

"그런데... 누구시죠?"

지하철이 역에 도착했다.
급히 지갑에서 명함 한장을 꺼냈다. 그녀 무릎에 던지듯 내려 놓았다.

"나중에 전화해...."

명함을 받아들고 이름을 확인한 그녀가 웃음을 띄며 10여년전의 그 표정으로 돌아올 즈음
나는 이미 지하철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오늘 있었던 일이다.
머지 않은 시간에 주연에게 과연 연락이 올까?
연락이 온다면 또 어떻게 하고?
글쎄.......
언제나 내게 갑작스럽고 돌발적이던 주연는 이번에도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깊은 잠에 빠져야만 할 것 같다.
오늘 일이 아쉽지 않게 느껴질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려면 말이다.
아니, 어쩌면 10여년전의 그 추억은 이미 지하철을 타고
기억의 저편 끝자락으로 사라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 일산마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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