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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그리고 전화방

털민웨이터 1 416 0


1.
경험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다.
경험이라는 단어가 추억이라는 단어로 업그레이드되며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가하면
때로는 차라리 생기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끔찍한 감정들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떠먹는 야쿠르트를 먹으면
항상 마지막 용기에 남아있는 야쿠르트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숟가락으로 요령을 부려도 마지막 분량은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럴 때 체면 불구하고 작은 그릇을 잔인하게 칼질하여
구석구석 낼름낼름 빨아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런 무모한 행위는 남에게 들키는 순간
변태로 오인하게 되는 치명적 증거만을 남겨줄 뿐이다.
가끔 그런 고민에 잠겨있다 어느날 훌륭한 대안을 찾았다.
같은 요구르트의 맛을 내면서도 마지막 마무리를 비교적 훌륭히 할 수 있는 제품을 찾은 것이다.
바로 아이들이 잘 먹는 <짜요X요>다.
길다란 비닐에 들어있어 입구를 오픈한 뒤 입에 넣고 이름 그대로 쥐어 짜면 된다.
확실히 효율적인 방법이다.
물론 여기서도 약간의 용량이 누출되나
이전 용기에 담겨있는 제품에 비해 그 양이 매우 미약함으로
상대적으로 누출용량이 없다는 표현도 적당할 듯 싶다.
그런 제품을 밤늦은 시간에 먹다가 문득 입으로 들어오는 요쿠르트와
그것을 먹기 위해 할 수 없이 행하게 되는 자세의 상관관계가 연관되는 상황을 접하니
여자들이 남자 거시기를 빨다가 남자가 바로 입안에 싸버리는,
흉칙하고도 자극적인 장면속의 여자가 가지는 느낌이 떠올랐다.
맛만 다르지 상황이나 느낌은 바로 이럴 것이다.

이렇듯 경험이란 굳이 똑같은 것을 하진 않아도
대충 비슷한 경험에서 수많은 교훈들과 체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슷한 경험으로 얻어지는 오리지날 효과의 학습이라는 것인데,
학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혼자만의 개똥철학이므로
이 얘기를 어디가서 잘난 체 하느라고 인용한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2.
내 인생의 황금기는 두번이 있었다.
그 황금기라는 것이 보통의 경우처럼 남들에게 이목을 받는다던가,
아니면 돈이 팍팍 들어와서 지갑이 접혀지지 않았다는 전설적 시기였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나의 황금기는 그것이 아니고
규칙적인 일과가 끝나면 재미있게 할만한 일이 생겼다는 소심한 황금기였다.
첫번째 항금기는 세계에 내놓아도 순도가 떨어지지 않는 변태 빛나리가 디제이하던 다방에서
죽치던 시절이고 두번째 황금기가 바로 전화방이라는 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전화방이라는 것이 가지는 문화적 충격, 그리고 취향과 상통하는 코드적 궁합은
10여년전의 음악다방 죽돌이 시절보다 더 행복하게 했다.
일일이 글로 기록하기에 조금 벅찰듯한 많은 경험과 사건들이 있었고
가장 시간을 절약하고 비용을 저렴하게 하면서 만족도를 최상급으로 끌어올리는
경제원리의 진수를 몸소 경험하게 해준 황금시기였다.
그러나 그런 전화방의 시대도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첨단 IT 산업에 밀리게 되어
영원불멸할 것 같던 황금기는 급속하게 황혼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게 전화방이 황혼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3.
집에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상가건물이 있고 그곳에 전화방이 있었다.
전화방은 거리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커다란 입간판을 세워두어 조금만 신경쓰면 쉽게 잊기도 힘든 곳이었다.
항상 집으로 들어갈 때쯤이면 유난히 빛나는 입간판을 보며
언젠가는 저곳에 가야한다는 굳은 사명감을 느끼곤 했으나
이미 알콜이 언어구사 능력을 둔화시킨 상태라
말빨로 승부해야 하는 전화방의 출입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집으로 가기전에 마신 술이 약 2%가 모자라는,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결국 집앞의 전화방에 들어갔으나 이미 사양길에 들어간 전화방 사업은
다른 손님의 입장을 거부하는 듯 실내는 썰렁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시간도 이미 새벽 2시를 향하고 있었으니 들어오는 놈도 이상하지만
그 시간에 전화하고 나오겠다는 년도 이상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카운터에 앉아 손님에게 인사하는 아가씨도 핵폭탄급이었다.
빵빵한 얼굴에 육중한 가슴, 그리고 펑퍼짐한 엉덩이는
어른들에게 맏며느리감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자기 인생의 최대 찬사로 여겨야할 만큼 비극적이었다.
더욱이 촌스러운 긴 생머리와 손질안된 코디네이트가 절묘한 불협화음을 일으킬 때쯤엔
이미 마신 술이 다 깨버리는 것 같았다.
이런 여자는 이 시대 최고의 변태 빛나리가 봐도
고개를 좌로 세번 우로 세번 저으며 딸딸이의 우수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그 아가씨가 안내해준 방으로 입장한뒤 잠시 전화를 기다렸지만
분위기상으로 보나 그날의 일진으로 보나 여기서 전화를 가다리느니
호수공원앞에 앉아 있는게 누군가를 만날 확률이 더 높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잠이 들고 말았다.

4.
"아저씨 문닫아야 하거든요?"

전화방 골방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쪽팔린데
미모로는 도저히 점수가 나오지 않는 카운터 아가씨가 방까지 들어와 잠을 깨우니
이런 나의 모습은 미참함 그 자체였다. 시계를 보니 4시가 되어간다.
시선을 시계에서 아가씨로 돌렸다.
술이 조금 더 깼으니 미모는 아까보다 더 낮아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생각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 두가지가 떠올랐다.

- 저 사람은 여자다.
- 현재 이곳엔 우리 둘 뿐이다.

이런 절묘한 상황을 맞는 기묘한 인연의 당사자가 하필이면 이 아가씨라는 점이 맘에 걸렸지만
그것은 위의 기본적인 2가지 조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애써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기본에만 충실하도록 했다.
못생긴 여자에게는 그냥 찔러보면 된다. 싫으면 말고, 아쉬우면 딸딸이도 있고....
대충 성의없는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그냥 오빠랑 할래?"

돈주고 하는 집에서도 이렇게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해본적이 없지만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렇게 거만하게 묻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죽을 것 만 같았다.
빛나리가 잘가는 필리핀 원주민을 닮은 맏며느리감 아가씨는 내 질문을 듣고
잠시 진위여부를 판단하고는 선뜻 대답했다.

"문좀 잠그고 올께요"

그리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상대의 미모만으로는 도저히 가동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녀석'도
전화방에 와서 카운터 아가씨 꼬셔서 먹었다는,
이색 경력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에 흥분했는지 곧잘 움직여줬다.
몇살이나 먹었는지 뉘집 딸래미인지도 모른 채 그냥 먹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묻지 않아야 미모에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어
의도적으로 묻지 않은 채 열심히 했다.
오로지 머릿속에서 할 수 있었던 생각은 전화방에 오래 다니다보니 별 경험을 다 해본다는
선구자적 자세와 이 사건을 빛나리에게 자세히 묘사해줘야겠다는
쓸 데 없는 우정의 확인뿐이었다.
일을 마치고 허리띠를 채 추스르기도 전에 전화방을 나섰다.
길거리에서 바지춤을 추스리면 지나가는 사람이 이상한 놈으로 볼까봐
일부러 취한 척 비틀거리며 바지춤을 추스렸다.
떡을 쳤으면 기분이 좋던가 찜찜하던가 둘중에 한가지의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이번에 획기적으로 화가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화방 입간판이 노란 불빛을 번쩍거리며 눈앞에 서있다.
이단옆차기를 날렸다. (훗날 이 이단옆차기는
얘기를 전해들은 빛나리에 의해 '지랄옆차기'로 바뀌었다.)
아크릴로 만든 입간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속에 들어있는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습지도 않은 경험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5.
얼마전 집에 들어가다 그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전화방은 이제 추억에서나 생각날 수 있는 곳인줄 알았는데
아직 그집은 영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영업을 그동안 안해서 내가 못보고 지나쳤는지
아니면 계속 간판은 켜져있었는데 전화방이라는 곳이 이미 이목을 끌기엔
너무도 매력이 없는 곳으로 변했기 때문인지 그동안 그 입간판은 볼 수가 없었다.
근처로 다가가 자세히 보니 몇년전에 날린 이단옆차기로 인해 생긴 상처에
파란색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흔적이 있을 때 비로소 경험이 완성되는 모양이다.

* * *

게시판의 글이나 책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본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나의 상상속 세계를 완성시켜주고,
내가 원하는 경험의 상상적 한계를 넓혀주곤 한다.
또 그러한 남의 경험들은 이미 잊혀진 채로 기억의 한구석에서 뭍혀있던
나의 소중한 기억 한가지를 되살려준다.
이런 다양한 여러 경험들에 대한 경험을 종합하여 오늘도 기기묘묘한 상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져 훗날 그것이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또 긴 잠에 빠진다.


- 일산마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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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토도사 2023.02.2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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