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담 야설

신체포기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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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반지의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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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드컵 이전이니 대충 2년여전 쯤 얘기입니다.
채팅으로 꼬신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내로 향했습니다.
약속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어
일찌감치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후 그 여자를 만났는데 폭탄이었다던가 혹은 보기 드문 킹카가 나왔다거나,
그리고 이어서 떡을 쳤는데 잘 쳤다던가 혹은 안 서서 개망신 당했다는 얘기가
이번 이야기의 주요 내용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불행히도 이번 이야기에 떡 이야기는 단 한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국내 최고의 성인 사이트에 들어와
떡친 이야기 하나 없이 긴 장문의 글을 이어간다는 사실이 상당히 민망합니다만
일산마루는 맨날 떡만 치는 놈이라는 이미지를 새롭게 바꿔보고자
떡과 전혀 관련이 없는 얘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떡 이야기가 없다고 실망하시는 분들은 이 자리에서 가차없이 빽 스페이스를 눌러
다른 야리꾸리한 제목의 글을 검색하던가,
스포츠신문 사이트에서 연재만화를 보시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이롭습니다.

2.

시간이 많이 남아 이 시대 최고의 변태인 친구 빛나리가 일하는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곳은 하도 자주 가서 내가 여기 직원인지, 거래처 손님인지
그곳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도 헷갈리는 곳입니다.
그날도 늘 그랬던 것처럼 남자만 서넛이 자리에 앉아 꼼지락 대고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커피를 한잔 타고
늘 내가 앉던 빈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바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무실은 내게 커피를 타주는 일도 없습니다.
이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기기묘묘한 일들은
나중에 책한권으로 묶어도 남을만큼 장황합니다만
지금의 내용은 그게 아니니 과감히 생략합니다.
바둑이 두판째에 접어들 무렵 후배 직원 한사람이 빛나리의 책상으로 다가갔습니다.

"저, 돈좀 꿔주실래요?"

무언가 집중하고 있던 빛나리는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대꾸했습니다.

"떡치러 가냐?"
"네?"

이 새끼 대가리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나 궁금했습니다.
빛나리가 또 물었습니다.

"얼마?"
"5만원요."
"갚을거냐?"

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화내용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돈을 꿔주면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이 세계의 통상관례인데 그걸 묻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 친구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대답을 해야 할 순간에 그는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글쎄요....."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이런 상황이 상당히 자주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낸 빛나리는 돈을 건네기전 이상한 제안을 했습니다.

"얼른 신체포기각서 한장 써라."
"네?"
"신체포기각서 몰라?"

당시는 신체포기각서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던 때였습니다.
당연히 그 말은 대화의 화두가 되었고 사회적인 이슈였습니다.
젊은 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번엔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써줄께."

급기야 빛나리는 프린터에 꼽혀있는 A4용지 한장을 쭉 잡아 뽑더니
정말 신체포기각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진짜로 쓰는지 안쓰는지 궁금해서 자리에 일어나 슬그머니 빛나리 책상으로 이동했습니다.
정말 그 녀석은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3.

가만히 녀석의 행동을 지켜보는데 그만 까무라칠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신체포기각서의 첫머리에 빛나리는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신체 표기 각서"

내가 빛나리하고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까
최소한 내가 확인한 바로는 빛나리가 최소한 중학교는 졸업했다는 건데
어떻게 신체포기각서 라는 단어 하나 무슨 뜻인지 모르는지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의무교육을 완전히 농락하는 흉칙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얼른 신체표기각서가 아니라 '신체포기각서'라고 고쳐쓰라고 말하려다 생각해보니
그걸 지적하면 후배 직원 앞에서 빛나리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편으로 내가 왜 이 녀석 무식을 바로 잡아 줘야 합니까?
이런 놈은 제대로 개망신을 당해서 상식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한동안 내가 이 녀석을 놀릴 때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레파토리로 남겨둬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말 하지 않고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돈을 꿔가는 후배직원의 고단수 사악함이었습니다.
이미 각서의 제목이 잘못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의 가증스런 눈빛으로 미루어 아마 이 친구도
나중에 각서가 문제가 되었을 극단의 상황에 도달했을 때 잘못 쓰여진 문자를 토대로
5만원을 떼어 먹겠다는 고단수 전략을 펼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수들만 사는 무서운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번 주까지 갚아라! 안 그러면 너 큰일난다!"
"네!"

후배직원은 엉터리 각서라고 생각한 그 각서에 자신있게 사인을 하더니 5만원을 가져갔습니다.
나중에라도 말해주려다 개망신 한번 당해보라고 꾹 참고 있었습니다.

4.

다음주에 또 그 사무실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거의 일주일에 한번은 갔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하는데 외근나갔다 들어오는 그 후배직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지난주에 있었던 각서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빛나리를 개망신 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 생각되었습니다.
후배에게 큰소리로 지난 주 사건을 회상시키는 동시에
또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발단시키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이, 김형! 지난주에 꾼 돈 갚았어?"

나름대로 고수의 면모를 갖춘 후배는 잠시 지나간 사건을 상기시킨 내게
원망을 눈초리를 보내다 이내 비겁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헤헤."

갑자기 우리의 대화를 들은 빛나리가 지난 주의 일이 생각났는지 후배사원을 불렀습니다.

"각서까지 써놓고 왜 안 갚아?"

빛나리 책상 앞에 멋적게 서있던 후배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수들이 흔히 이용하는 버티기로 일관할 자세를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각서대로 집행한다! 오케?"

드디어 빛나리가 칼을 뽑았습니다. 이제부터 재미있는 사건이 시작됩니다.
나는 그냥 구경만 하면 되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빛나리의 변태성은 익히 알고 있었으니 믿어 의심치 않았고,
또한 후배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임이 확인되어
재미있는 사건이 시작될 순간이었습니다.

빛나리는 후배를 한발 더 가깝게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즈막히 말했습니다.

"팔 내놔!"
"내? 팔요?"

엉겹결에 팔을 앞으로 쭉 뻗자
빛나리는 후배 사원의 팔에 싸인펜으로 '팔'이라고 적었습니다.

"배 걷어!"
"네?"

자신도 어지간한 고수라고 생각했던 후배도 뭘 하는지 두고보자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셔츠를 걷고 속옷을 들쳐 배가 보이게 했습니다.
빛나리는 그 배에다 큼직한 글씨로 '배'라고 썼습니다. 이번엔 유성매직이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변태 빛나리는 무식한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각 신체에 그 명칭을 '표기'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후배는 긴장했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배꼽에는 볼펜으로 '배꼽'이라 쓸 것이고
자지에는 커다랗게 '자지'라고 쓸 것이 뻔했습니다.
거기까지야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다 쳐도 얼굴에 '얼굴'이라고 쓴다거나
눈동자에다 '눈깔'이라고 쓰면 어찌 되겠습니까?
거기까지도 참을만 합니다. 만약 이 변태 새끼가 미친 척하며 간에는 '간', 위에는 '위',
십이지장에는 '12지장', 뇌에는 '뇌'이라 표기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결국 후배는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도망갔습니다.
빛나리는 혼잣말로 탄식했습니다.

'나쁜 놈, 약속도 안 지키네...."

이후 후배는 두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체포기각서 사건의 전말이었습니다.


5.

가끔 주변에서 재미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생동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왜 사느냐?'는 사춘기적 질문을 할 때
언제나 나는 '재미'와 '흥미' 때문에 산다고 대답합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재미'와 흥미'가 없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또 재미있는 세계를 찾아나설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일은 내가 재미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실 또한
영악하게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가끔, 나는 인생이 즐겁다는 착각을 합니다.






일산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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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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