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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 - 하편

토도사 야설 0 308 0
~ 하편 ~







어느날 갑작스럽게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나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집에 안들어와. 혼자서 일본여행 좀 갔다올거거든.
물론 너를 데려갈 수는 없어. 그러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렴."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싫다고 고개를 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법정상으로 나의 양어머니이자, 나의 주인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래야 착한 내 도구지."
라고 말하며 내 머리를 하이힐을 신은 발로 쓰다듬는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집을 나가버리는 그녀였다.
나는.. 과연 그녀가 없는 일주일동안 버틸 수 있을까?
여러가지 의미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절대로...





*




그녀가 여행을 간다며 집을 나선지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집을 나서면서 신발장에 나를 묶어두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에
그녀가 명령하지 않는 이상 이 자리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물론, 밥도. 화장실도 말이다.





*





그녀가 여행을 간다며 집을 나선지 일주일 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제는 멍해지는 머리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를 축 늘어트린 채
현관문을 그저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다.





*




그녀가 여행을 간다며 집을 나선지.. 오늘로써 대체 몇일째 인걸까?
이제는 정신도 몽롱해져 오늘이 몇일째인지 생각할 기력조차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지금껏 그녀가 나를 취급하지 않을 때에 말을 걸어왔던
그 내용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너는 말을 못한다지? 도대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던거니?"

"말하기 싫어? 난 네 주인이야. 어서 말해."

"그래. 말 안하겠다 이거구나. 그렇다면 벌을 받도록 하렴. 네가 말을
할 때까지 계속해서 벌을 줄테니 그렇게 알고있어."

"벌써 5일째야. 그렇게까지 말하기가 싫으니? 내가 못 미더워?"

"그래 알았어. 내가 포기할게. 하지만 언젠가는 말해줘야만 해. 알았지?
약속한다면 이제 벌주는건 그만하도록 할게."

"그래 알았어. 언젠가 형석이 네가 말하고 싶어지는 때가 오면 말하렴."

"넌 내가 싫으니? 왜그렇게 겁을먹는거야?!"

"나가! 너같은건 꼴도보기 싫어. 차라리 죽어버려. 말도 못하는 벙어리!"

"벙어리면 벙어리답게 내가 하라는데로 하란 말이야. 토도 못다는게 어디서
반항질은 반항질이야?! 죽고싶어?!"



그녀와 초반의 생활은 그녀의 방식에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나.
그러한 나를 자신의 방식대로 길들이려 하는 그녀.
충돌만 있었다. 심한 말도 많이 들었다.
그녀가 하라는 것들은 전부 결국에는 해왔다. 지금에서는 그녀가 명령하는
것을 애타게 기다릴 정도로 그녀에게 나는 길들여졌다.
하지만 딱 하나.
이것만큼은 내가 말하고싶다.
나의 과거와. 나의 마음만큼은.





***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현재 심한 태풍으로 인하여 항공을 지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항공이 재개되는 것은 태풍이 지나가는 3일 뒤로 연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에 따른 보상은 사무처와 행정처. 그리고 이 번호로 문의해주시기 바랍...


"뭐야 태풍? 갑자기 무슨.. 이렇게되면 최악의 경우 4일이나 늦게 집에 들어가잖아.
형석이는 괜찮을까... 아냐 괜찮을거야. 처음에는 많이 싸웠지만 지금에 와서는
내 말도 잘 듣는 착한애니까.. 그래, 괜찮을거야 분명."





***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혹은 메시지를 남기시길 원하시면 1번...

"왜 안받아..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니겠지? 설마.. 빨리.. 빨리 태풍이 지나갔으면..!"
불길한 예감이 들어. 빨리 형석이 곁으로 돌아가고싶어.. 빨리..!




***



저희 일본항공을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곧 있으면 서울항공에 도착하게되며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벨트...

드디어 돌아왔어. 빨리 형석이를 보고싶어.. 빨리....





***





택시를 타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
집에서, 10일만에 돌아온 집에서 처음으로 본것은.. 형석이의 쓰러진 모습이었다.
"...... 형석아...? 형석아--!!!!"
패닉에 빠져버린 나는 형석이의 축 쳐진 몸을 안았다. 처음으로 형석이를 안아봤다.
형석이를 입양해온지 벌써 1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단 한번도 안아준 적은 없었다.
형석이가 쓰러진 주위에는 오줌과 똥. 그리고 침으로 상당한 악취를 풍기고 인간
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피하게 되는 그런 참상이었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형석이가 쓰러져있다는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이... 얕아......!
어째서..? 어째서 쓰러진거지? 분명 내가 나갈 때까지만해도 아픈 곳은 없었는데...!
어째..... 설마...! 설마!! 아니야.. 하지만.. 아냐 그럴수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이 바보야!! 어째서... 어째서 이럴때마저 내가 명령하기를 기다린거야! 너 바보야?!"
"어째서.. 어째서 그랬던거야...!!"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나는 상상이 갔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것에 대한 황당함과 충격과 미안함..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고 약 15분이 지났을 때 쯤. 구급차와 그 안에서 몇명의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의 형석이를... 들것에 실고 가며,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건냈지만 나는 질문에
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형석이를 따라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여기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수술실로 들어갔으니 잠시 후에 경과를 알려드
리도록 하죠. 걱정되시는건 알지만,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의사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 수술실까지 와버린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기억이 없었다. 그저 형석이를 보며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나는 도구같은거에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변한거지..?
어째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거지..?
어째서.. 나는 이다지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픈거지..?
어째서.. 아니,


나는 알고있다.


그래,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로써가 아닌, 여자로써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깨닫게 된 순간..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가 무사하기를... 제발.. 신이시여....!"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으고 그가 무사하도록 신에게 비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여기...는..?
항상 있던 주인님.. 아니, 그녀의 집이 아니다. 여기는 어디지..?
몸을 일으켜서 어딘지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그건 무리였다.
"으...윽.. 몸이 안움직여...?"
간신히 고개만 돌려서 주위를 보려고 한 순간. 내 옆에서 누군가가 엎드려서
자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누군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의 주인님. 그녀였던 것이다.
"어째..서..?"
"으음.. 어, 어...!"
"일어난거야? 몸은? 괜찮은거지? 아픈데는 없어?!"
내가 부스럭거리고 중얼거린 탓인지 그녀가 깨어났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다짜고짜 알 수없는 소리를 물어왔지만 나는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제가 도대체 어떻게된거죠..?"
그녀는 나의 질문에 갑작스레 눈물을 머금더니, 지금까지의 얘기를 해줬다.
나는 이틀동안 잠들어있었다고 한다. 의사의 말로는 영양보충과 수분보충을
하지 못한채로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탓이니 목숨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나에게 얘기를 다한 후.. 나의 가슴에 뛰어들어 투닥투닥 가슴을 주먹을 때렸다.
아프지는 않다. 그저.. 그녀가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것이 이해가 안될 뿐이다.
"어째서.. 우는거예요.. 주인님..?"
"너.. 말.. 한거야..? 지금...? 그치? 말한거지?!"
"네.."
"말 할 수 있었던거야?"
"네.."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벙어리인척 했던거야?"
"그건.."
"아니, 됐어. 나부터 먼저 말할게 있어. 그리고나서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을래?"
그녀가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처음은 그녀와 생활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나의 과거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내가 끝까지 대답하지않자, 나에게 동의를 구하며 약속을 했던 그 때였다.
"나 형석이 네가 좋아. 네가 이번에 이렇게 되어버렸을 때 알게됐어."




"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주는 것이..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그녀의 그 마음에 보답하기로.


"저는.. 주인님에게 입양되기 1년 전에 강간을 당했어요. 친엄마에게..
어머니는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셨는데, 의도치않게 나를 낳으셨다고 하셨어요.
상대방이 누군지 아세요? 말하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12살의 초등학생이 저의 아빠였어요. 제가 6살이 막 되던 해에 어머니께서
저를 강간하셨어요. 어머니에게 아무런 사랑을 못받고 자랐던 저였지만..
그렇다해도 어머니는 나에게 있어서 단 한명의.. 절 보살펴주는 상대였으니까요.
그때까지는 그래도 유치원도 다니고 그랬었는데, 그렇게 강간을 처음으로 당하고
그로부터도 3개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강간을 당했어요. 그러다 어머니는
저를 고아원에 버리시고 떠나셨죠.
아마도 제가 질려버린게 아닐까요..?
저는 그 일을 계기로 말을 하지 않게 되었어요..
어머니에게 강간당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저는 말을 안하게되었었죠."



" 하지만... "



" 저도 주인님을 사랑해요.. 쭉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 누구보다도 더..! "







~ Epilogue ~






나의 하루일과는 중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밥을 차리고, 그녀가 씻고난 후의 물을 마시고
그녀가 밥을 먹는 동안 그녀의 발받침대가 되고,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소변도, 대변도, 밥도 먹지 못한다.


하지만, 달라진게 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해주는 일이다.
그녀는 나에게 하루 세끼 밥을 먹도록 허락해주었고, 내가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싶다고할 때에도 항상 허락해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키스를 해주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섹스를 해주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그 날 했던 말을 기억한다.



" 나는.. 널 그런식으로 안본단다. 너를 그런식으로 대하지 않을거야.
내 마음은.. 진심이야.. 나와 결혼해줘.. 형석씨.. "


그녀가 했던 이 말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앞으로 한달 뒤면 정미씨와 나는 결혼식을 하게된다.
참석자는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 단둘이서 하는 결혼식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 그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녀와 나의 결혼식은 특별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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