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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르는 일 - 중

토도사 0 555 0

난 모르는 일 - 중

난 모르는 일 - 중


쪽진 반달이 지하철 출구 가로수 나뭇가지에 걸렸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핥고 지나가면서 밖이 더 추워지고 있다고 윙윙 거린다.
아직 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멋을 한껏 부리느라 치마에 얇은 옷가지를 걸쳐 입은 미스 김의 얼굴은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겠는 듯 파랗게 상기된 채 가지에 걸친 반달을 막아서며 다가온다.
"춥지?" 출구를 나서며 얼른 바바리 코드를 벗어 미스 김의 어깨에 걸쳐줬다.
"네. 생각보담 봄이 늦네요." 코드 소매에 손을 넣으며 말을 받아준다.
"이런 날은 커피 보담 따뜻한 오뎅국물이 최곤데, 미스김도 좋아하나?"
"그럼요. 추울 땐 오뎅이 최고죠."
"어디 잘 하는 오뎅집 있어?"
"아뇨, 과장님이 좋은 데 있음 데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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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를 건너 한 블록만 지나면 참새구이며 오뎅 쪼가리를 파는 허름한 포장 마차가 있다. 이 집은 어둑한 골목에 있어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멸치국물을 잔잔하게 우려내서 만든 오뎅맛이 일품이라서 아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편이다. 국물 바닥 속에는 멸치 뿐만 아니라 꽃게에서 우러나는 깔끔한 맛 때문에 오뎅이 먹고 싶으면 좀 거리가 멀더라도 이 곳을 찾곤 했다. 지난 겨울엔 한번도 찾지 못해서 아쉽다 싶었는데 이렇게 늦게 나마 쌀쌀한 초봄에라도 찾게 되어 시원한 오뎅국물에 벌써 침이 삼켜진다.
"과장님은 가족을 많이 사랑하나봐."
"응, 포근하려고 노력하지."
"몇년 됐어요?"
"글세, 한 십년 됐나?"
"아직도 식지 않았어요?"
"식긴...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생각인데."
"어머, 정말 대단하네요. 요즘 이혼률이 세계 1위라는데..."
"쉽게 뜨거운 냄비는 쉽게 식기 마련일 뿐이야."
"그럼 어렵게 결혼했나봐요?"
"그래, 어렵게 했지. 양가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했었으니까."
"멋져요. 사랑 때문에?"
"응, 그랬던 것 같아."
"싱겁다. 뭔 사연인지 얘기 해줘요."
"아냐, 남들처럼 쉽게 사랑했던 것은 아닐 뿐이지 뭐."
"불독같이 무서운 과장님에게도 로맨스가 있었다니 신기해요."
"제 눈의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자기 짝이 있기 마련일 뿐이지 대단한 건 아니었어."
"그럼 저도 눈에 차는 사람이 생길래나요?"
"그렇겠지. 눈에 콩깍지 씌운 사람이 나타나면 혼이 빠져서 결혼하고 말걸.."
"과장님, 근데 저 정말 촐랑거려요?"
"촐랑거리긴, 예뻐."
"근데 아깐 왜 그랬어요?"
"속상했잖아. 미스 박이 상처 입어서 힘들어하는데 미스김이 나 몰라라 해 버리니까..."
"우와, 과장님은 정말 속도 깊구나."
"이해할 수 있겠어?"
"좋아요. 그런 뜻에서 저를 야단 친거라면 과장님이 존경 스럽네요."
"쉽게 풀려서 다행이네."
"과장님 제가 한턱 쏠테니까 우중충한테 말구 좀 근사한대루 가요."
"왜? 여기 싫었어?"
"아이, 좀 칙칙하잖아요. 노인정 같기두 하구."
"하긴 오뎅집은 미스김처럼 발랄한 세대가 머물 공간은 아니지."
"그래요. 제가 오해했다는걸 알게 되니까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요."
"그럼 어딜 갈건데?"
"과장님 혹시 나이트 가봤어요?"
"아니. 십년전에 가봤을라나?"
"어휴, 구식..."
"난 노래와 춤엔 잼벵이야. 어깨두 안올라가고 박자도 엇박자 걸랑."
"그럼 저 노는 것만 구경할래요?"
미스 김이 이끄는데로 가까운 나이트를 찾았다.
젊어서 너무 젊어서인지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이들로 북적 거렸다.
중늙은이라도 혹시 있으면 벗하고 싶었지만 눈을 까 뒤집고 헤메도 방방 뜨는 아이들 뿐이다. 스테이지를 가득 메운 천방지축 날뛰는 아이들의 노는 품세를 보니 벌써 세상의 기본 축에서 밀려난 느낌이다. 나도 한때는 저렇게 날 뛰면서 중늙은이가 이런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면 늙은냄새 난다며 멀찌감치 도망갔었던 시절이 있었을텐데 어느새 세상의 즐거움으로부터 멀찌감치 내 동댕이 쳐진 기분이 들었다.
기본 안주와 맥주를 시켜 놓곤 미스김은 내가 자리나 지키는 멍멍이로 생각하는지 벌써 스테이지를 누비며 광란의 춤을 추고 있다. 한때 스테이지가 좁다며 탱고와 부르스로 무대를 누비던 옛 추억이 주마등 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는 고고 한곡이 끝나면 어김없이 슬로우락이 울려 퍼지며 은은한 연인들의 공간이 마련됐었는데 이제는 열곡에 한번 쯤 울려퍼지는 것을 보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장님, 부르스에요." 미스 김이 상념에 젖은 내 팔을 흔들어 깨우며 무대 위로 나를 이끈다. 진한 여운이 깔리며 무대는 커다란 공간으로 다가온다. 광란의 몸짓으로 무대를 뽐내던 수많은 젊은 청춘들은 어느새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으며 몇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무대 공간이 남겨졌다.
"부르스 알아?"
"몰라요. 그냥 이렇게 잡고 있으면 되는거 아네요?"
"내가 스텝을 밟을 테니까 발 끝에 밀리는데로 옮기기만 해봐."
기본 스텝을 밟으며 발끝으로 미스김의 발이 놓여할 자리까지 밀어 주면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스텝에 이끌려 부르스에 익숙해 지고 있다.
"어머, 과장님 부르스 굉장해요."
"응 이건 기본 스텝이야. 어플리케이션을 밟으면 미스 김도 정신이 멍해질걸?"
"그게 어떤 건데요?"
"우선 내가 이끄는데로 기본 스텝만 밟아봐. 이게 익숙해지며 다음 곡이 나올 때쯤엔 어플리케이션으로 미스김에게 부르스가 뭔지 보여줄테니까."
"과장님 춤 못춘다면서요?"
"다 잊었지. 어깨가 올라가지도 않거든."
몇 번의 시도를 통해 미스김에게 어렵지 않을 정도의 부르스 기본 스텝을 밟을 수 있게 했다. 불이 밝게 빛나며 허공이 싸이키가 윙윙 돌아가는 현란한 고고타임이 시작됐다. 나는 서둘러 미스김만 남겨 둔채 비워졌던 자리로 돌아와 엉덩이를 깊게 묻고 또 상념에 빠진다.
"오빠, 나 저 사람이랑 춤춰도 돼?" 난주가 다가와 귓엣말로 묻는다.
"누구?" 감히 어떤 놈이 내 짝지에게 춤추자고 제의했는지 궁금해서 좌우로 훑어봤다.
"저기, 빵모자 쓴 사람이 영화감독이걸랑. 그 사람이 한판 추자고 그러네."
"추고 싶니?" 설마 그렇다는 얘기가 나오리란 생각을 못했는 지라 불쑥 물어봤다.
"응, 저사람이랑 알고 지내면 뜰 것 같거든." 난주는 영화속 주인공이 되고 싶은 오랜 소원이 한판 춤으로 판가름 날 것이란 기대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나 보다 영화가 좋다면 그래야 겠지?"
"오늘만 저 빵모자랑 어울리면 난 영화배우가 된단말야." 난주는 앙탈하듯 졸라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멋진 춤을 소화해 내는 영화감독 빵모자를 질시의 눈으로 쳐다 봤다.
춤사위 몇번 맞춰준다고 난주의 몸이 달아나는 것도 아닌 판에 궃이 안된다고 말릴 형편도 아니었다. 가서 멋진 춤 한판 추고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하는 난주의 간절함을 막을 방법도 내게는 없었다.
부르스 곡이 홀 안에 가득했다.
멋진 엉덩이 춤을 추던 난주는 어느새 빵모자의 어깨에 두 팔을 올리고 끈적한 춤의 향연을 벌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나이트를 나와버렸다. 난주는 다음날부터 내 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다만 몇 달 후엔가 어느 유행가 처럼 흔한 국산 영화 포스터에 난주의 얼굴이 크게 크로즈업되어 명동 길거리를 도배해 버렸다. 에로배우. 한국 최고의 여우. 숫한 남정네의 연인으로 오랜시간 메스컴을 지배하며 살고있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잃어버린 한 여자의 일생은 이렇게 화려하게 시작됐을 뿐이다.
다시 미스김이 다가왔다.
"과장님 부르스 곡이 나와요." 잠에서 깬 듯 불현 듯 무대로 내달음 쳤다.
잃어버린 것과 버린것의 차이점이 명백히 교차됐다.
미스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았다.
미스김의 가느다란 두 팔도 내 목을 감아왔다.
벌떡이는 아랫배는 어느새 굵은 힘줄이 드러나며 두터운 장벽을 뚫으려는 몸부림이 시작된다. 얇은 스웨터 위로 미스김의 가슴살이 솟아 오르며 내 가슴 아래를 짓 눌러 압박한다.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고 거친 숨결이 흐르고.
허리를 안았던 한 팔을 내려 미스김의 엉덩이를 어루 만지고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당겨 본다. 몸부림치며 달라붙는 아랫배의 감촉을 뒤로 하고 또 한팔은 슬며시 미스김의 머리결을 따라 쓰다듬어 본다. 귓볼가까이에 불어 넣은 뜨거움을 느껴야 한다. 붉게 타오르는 입술을 향해 아래로 찍어 누르듯 입술을 옮겨 본다. 닿았다. 벌어졌다. 혀가 고른 치아를 통과한다. 치열의 흔적을 따라 혀를 돌려 본다. 뜨거운 또 다른 혀가 나를 향해 진격한다. 두 개의 혀는 서로 얽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탐닉한다.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길은 어느새 과감하게 처녀의 가슴위로 파고들었다. 단단하다. 더욱 단단해진 것 같다. 쓰다듬는다. 눌러본다. 돌려본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이러한 손놀림에 반응하지 않는 미스김의 인내심이 놀랍다. 아랫배를 타고 둔덕위에 손을 올려 본다. 흠찟 뒤로 엉덩이를 빼던 몸짓은 짐짓 모른 척하고 더욱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려는 듯 달겨든다.
"가자."
"어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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