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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호텔 1

토도사 0 542 0

러브호텔 1

러브호텔 1


러브호텔 1

첫째 이야기: 몰래 카메라 사건

"돈을 가지고 나오세요! 더도 덜도 아닌 삼백만원입니다. 반드시 당신 혼자 나와야 합니다. 만약 엉뚱한 생각을 한다거나 경찰에 신고를 하는
날에는 당신과 당신의 여비서가 주인공이 된 이 삼류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를 당신의 마누라 앞으로 보내 주겠소. 명심하세요."
전화를 끊은 진수는 괜스레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바야흐로 오랫동안 구상해 오던 사업의 첫 단추를 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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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저녁, 서울역의 시계탑 밑에서 오십을 조금 넘긴 뚱뚱한 사내 하나가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사내를 지켜보던 진수는 경찰의 잠복이 없는 것을 오랫동안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그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검은 선글라스에 챙이 큰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었다.
"이봐! 어쩌자고 이런 해괴한 짓을 하는 거야? 누구 신세 망칠 일있어? 액수도 가볍고 나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터이니 어서 그 비디오
테이프를 내 놓으시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다가오는 진수를 알아보고 서둘러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액수는 틀림없겠죠?"
"그걸 말이라고 하나?"
돈 가방을 건네 받은 진수는 신문지에 감싸 놓았던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자, 그럼..."
진수가 무어라고 말을 건네기도 전에 사내는 총총히 사라졌다. 유유히 근처의 지하 커피숍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은 진수는 가방을 열고 사내가
건네준 돈을 확인했다. 빳빳한 만원 짜리 신권 삼백장, 틀림없는 삼백만원 이었다. 진수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번져 갔다. 진수에게 돈을 건네준
사내는 제법 잘 나가는 전자 회사를 운영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런 사내가 그의 딸 같은 나이의 어여쁜 여비서와 함께 러브호텔에 들러서 재미를
보다가 재수 없게도 진수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적나라한 둘의 정사 장면을 비디오에 찍혀 가면서.
진수가 이곳 경기도 외각의 모 유원지 근처에 있는 러브호텔에 취업을 한 것은 대략 일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두어 번의 사업 실패로 인해
심신은 지쳐 있었고 나이는 어언 삼십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곳에 온 이후로 그는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새로운 희망으로 일어서려는 그에게 어느 날 작은 시련이 닥쳐왔다. 전날이 어머님의 생신이었던 관계로 집엘 들렀다가 아침 일찍 출근을 했던
그는 첫 손님에게 갑작스레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주차장으로 검정색 외제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올 때부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긴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참으로 싸가지 없게 생긴 어린 계집아이 하나와 문을 밀치고 들어선 사내는 다짜고짜 진수를 쳐다보며 말했었다.
"야! 깨끗하고 조용한 방 하나 줘라!"
참으로 기가 막혔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이십대 중반을 갓 넘긴 듯한 나이였다. 그런데 예사롭게 반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숙박
업소의 종업원이 술집의 웨이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인식 때문에 어느 정도의 반말은 참을 수 있었지만 이처럼 나이도 어린 애송이 같은
손님들까지 반말을 하는 데에는 정말 화가 치밀었다. 돈푼께나 있다고 안하무인격으로 되어 가고 있는 부모 잘 만난 부류들이었다.
"얼마냐!"
객실로 안내를 하고 방값을 지불할 때에 또다시 그가 건들거렸다. 방값을 받고 돌아서던 진수가 순간 획 돌아섰다.
"손님! 들으시기에 기분 나쁘시겠지만 아무에게나 그렇게 반말하는 버릇 좀 고쳐 주세요. 듣기에 기분이 불쾌하군요."
잠시의 기분을 참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순간, 돌아서던 사내의 손바닥이 진수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이유는 숙녀 앞에서 무안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진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손님과 문제가 생기면 불리한 것은 언제나 종업원이었다. 또한 업주들은 그 누구도 문제가 생겨
경찰들이 드나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날 이후, 진수는 모두에게 톡톡히 복수를 하기로 했다. 비록 돈을 벌기 위해 꾹 참고서 일년 동안 일은 해 왔지만 팔자 좋게 러브호텔을
찾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증오스러웠던가? 모두가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있을 벌건 대낮에 그것도 대부분 자신의 어린 딸과 같은 새파란
계집아이들을 끼고서, 보기에도 그 얼마나 역겨운 일들이었나..
며칠후, 서울 청계천 전자상가를 찾은 진수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한 가게에서 담뱃갑 만한 크기의 최신형 소형 비디오 카메라 한대와
부속품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자신이 일하고 있는 러브호텔로 돌아온 직후, 칠층의 제일 복도 끝쪽 객실 안 커튼 사이에 교묘히 위장을
한 후, 사온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그 뒷편에 있는 자기 숙소의 텔레비전과 비디오로 선을 연결해 놓았다. 그러다가 돈이 있어
보이고 바람을 피우는 것이 분명한 듯한 남녀가 호텔로 들어서면 그 방으로 태연히 안내를 하고 재빠르게 숙소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고 비디오로
녹화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알몸이 찍히는 줄도 모르고 들어선 남녀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정사를 벌일 것이다. 그 첫 케이스로 걸려든 것이 모
전자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오십 줄의 나이에 땅딸막한 체격의 소유자였지만 스물을 갓 넘긴 여자와 온 것으로 보아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분명
하였다.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승용차 문을 열고 자동차 등록증을 꺼내어 주소와 이름을 알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약 석달 후, 철저하게 바람을 피우고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로만 골라 약 오십 여명의 정사 장면을 비디오로 찍고 리스트를 작성한 후, 진수는
서서히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늘 그 첫 작전을 무사히 마친 것이다. 커피 한잔을 서서히 들이킨 진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어차피 그런 인간들은 쓰레기들이다. 돈 좀 있다고 우쭐대고 자기 자신들만 알고 집에서 자식을 속이고 마누라를 속이고
짐승처럼 욕망에 쫓겨 사는 인간들... 그런 작자들의 돈을 뜯는다고 해서 그리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던 아까의 그 사내가 떠올라 이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마누라가 무서우면 왜 숨겨 가며 몰래 바람을 피울까.
남자들이란... 하지만 돈이라면 자신의 육체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던지는 요즘의 젊은 여자들이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남자들의 가슴에 안겨 그 더럽고 추한 몸뚱이들을 흔들어대면서 그녀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할까. 물질 만능이 가져온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제부터 그 벌레 같은 년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리라.
진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대략 스물 다섯개의 전화번호와 신상이 적힌 종이 쪽지를 소중하게 매만졌다. 하나에 삼백만원씩만 잡아도 스물 다섯
명이면 칠천오백만원의 거금이 생길 것이다. 그러다가 좀 맘씨 좋은 사람을 만나면 오백에서 천만원 까지도 액수를 높여 보리라. 돈 몇백만원에
함부로 신고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늘 고생만 시켰던 어머니. 그 돈으로 실패한 사업도 일으키고 못다한 효도도 해야겠다.
얼마를 걷던 진수는 한적한 골목길에 이르러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보세요. 거기 박전무님 댁이죠?"
"네? 그런데요. 실례지만 누구 신지요?"
"예, 안녕하세요. 저 같은 회사에 일하고 있는 미스터 김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전무님 좀 바꿔 주세요."
"아, 그러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사십 줄쯤 돼 보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 나왔다. 진수가 두 번째로 점찍은 모 대기업의 전무였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이봐요? 정신 차리고 잘 들으세요. 지금 나는 당신이 불륜을 저지른 정사 장면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봐! 그게 무슨 소리야? 테이프라니..."
"지난 달, 토요일에 들렀던 러브호텔을 기억하지요?"
"헉!"
"그날 방에서 비밀리에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내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삼백을 준비해서 내일 종로 삼가 전철역 지하 매표소에서 기다리세요.
원한다면 테이프를 돌려주겠습니다. 저녁 여섯 시에 반드시 혼자 나와야 합니다."
"그... 그럽시다. 제발 테이프를 꼭 돌려주시오."
의외로 일이 쉽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바람을 피웠으니 어느 누구인들 테이프를 두려워하지 않으랴. 한심한 인간들... 다음날 저녁 여섯시,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종로 삼가 전철역으로 향한 진수는 가방을 들고 서성이고 있던 사내를 발견하고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갔다.
"물건은 준비되었습니까?"
"그러문요. 자 여기!"
순간, 손을 내미는 진수의 팔에 사내가 재빠른 동작으로 수갑을 채웠다. 잠복 중인 형사였다.
"앗! 어떻게 된 일이야! 이거 놔! 놓으라고!"
발악을 하는 진수에게 낯선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그래요, 이놈이 틀림없어요. 그날 그 호텔에서 방 안내를 했던 놈이. 이봐! 그 테이프는 어디에 있지?"
"감히 신고를 하다니... 약속이 틀리잖아?..."
"이봐! 이 미친 녀석아, 우린 부부야.. 나이 차이가 좀 나서 그렇지.. 넌 잘못 짚었던 거라구. 집에서 노부모님을 모시고 살기에 여관을
이용했을 뿐이야. 마누라가 워낙 소리를 잘 질러서. 젠장, 그것도 죄가 되나?"
"......"
모든 것을 체념한 진수는 순순히 형사들의 연행에 따랐다.
이 이야기는 경기도 인근에 있는 한 러브호텔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실제의 범인은 의외로 선한 마음씨를 가진 청년이었고 돈보다는 세상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을 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 경찰의 잠복근무를 눈치채고도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대낮에 러브호텔에 들리는 여관족들은 방에 들어서면 혹시나 숨겨 놓은 카메라가 있지나 않을까 살피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고 세상에
하나의 경종으로써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연출된 것이 아닌 실제의 생생한 포르노를 담은 그 많은 비디오 테이프들이
후에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둘째 이야기: 비극의 아버지와 딸

날씨는 구질구질 오후부터 쉬지 않고 가을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제기랄, 이놈의 날씨가 또 술생각을 하게 만드는구먼."
퇴근을 위해 양복 상의를 챙겨 입던 김과장은 사무실 창문 너머로 뿌옇게 흐려 있는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과장님! 퇴근 안하세요? 저희들 먼저 들어갈께요."
느그적 거리는 과장의 동작을 못 기다리겠다는 듯 여직원인 미스백과 미스홍이 먼저 조르륵 사무실의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쯧쯧, 요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없어서 탈이라니까."
김과장은 다소 불쾌한 듯 그녀들이 분별없이 풍기고 간 독한 향수냄새의 뒤를 핥으며 사무실을 나왔다.
"어이, 김과장! 날씨도 그런데 한잔 안 하려나?"
마찬가지로 퇴근을 하다가 복도에서 마주친 영업부 민부장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아 아닙니다. 민부장님, 오늘이 마침 마누라 생일날 이라서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김과장은 자기 자신이 그렇게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 놀랐다.
"아- 그래,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 대머리라도 꼬셔 보는 수밖에."
대머리라 불리우는 영업2부 신과장은 나이 사십을 갓 넘긴 나이답지 않게 전직 모 대통령처럼 대머리가 일찌감치 벗어진 민부장의 유일한 술 파트너
였다.
"흥흥, 한참을 젊고 혈기 왕성할 나이를 술로 보내다니... 쯧쯧 불쌍하도다."
저만치 사라지는 민부장을 바라보며 김과장은 흘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과장의 머릿속엔 이미 오늘을 멋지고 황홀하게 보낼 훌륭한 프로젝트가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들을 하던 그는 잠시 집에서 바가지를 들고 용감무쌍하게 안방을 지키고 있는 푹 퍼진 마누라를
떠올렸다. 지금부터 추진해야 할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일면의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시집 올 때만 하여도 예쁘다는 소리를 숱하게
듣던 그녀였다. 그러던 것이 굴비 새끼처럼 세 딸을 줄줄이 낳아 버리더니 이제는 아예 몸매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구마 자루처럼 푹 퍼져
버린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식욕만 왕성했으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밤의 욕구는 그것 이상으로 왕성하여 늘상 김과장을 의무방어전으로
내몰았다.
"크~ 지겨운 놈의 마누라."
회사를 한참을 벗어나 한적한 골목에서 택시를 내린 김과장은 전에도 두어 번은 왔을 법한 능숙한 폼으로 근처의 포장마차를 찾아 들었다.
"어머머 김사장님 오셨네. "
자신이 꽃다운 시절부터 청상 과부 였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오십대의 포장마차 여주인이 그런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아는 채를 했다. 우연히
포장마차를 찾았던 어느날 작은 중소기업의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것인데 그녀는 그 말을 진짜로 알아들은 모양 이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기실 이런 곳 아니면 언제 말년 오십 줄을 바라보는 과장이 사장님 소리를 들어보랴만.
"그래, 김천댁은 자식도 없이 내내 혼자 살었수?"
그의 단골메뉴인 소수 한병에 골뱅이를 시켜 놓고 김과장은 형식적인 물음을 던졌다. 머릿속에는 잠시 후의 프로젝트에 흥분해 하며 저만치 한쪽
길모퉁이에 비를 맞고 서있는 `로망스'란 네온 간판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바라볼 따름 이었다.
"에그 차라리 혼자 였으면 이놈의 팔자가 이렇게 사납지나 않지. 왠수 같은 자식놈 하나 때문에 녀석 대학 뒷바라지하며 이렇게 살고 있지
않겠수."
'흠. 열녀 났구먼.'
잠시 그렇게 생각하던 김과장은 서둘러 소줏잔을 비웠다.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야만 그의 목표는 100% 달성할 수 있는 터였다.
"그래, 김사장님은 자식이 어떻게 되시우?"
김천댁이 코를 훔치며 물었다.
"나야 딸만 오지리로 셋이니 아들 하나만도 못하지. 막내가 이제야 고등학교 3학년이고 두 년이 다 대학교엘 다니니.. 그럼 뭐하나. 멀쩡하게
키워 놓으면 언제고 훌쩍 떠나면 그만인데."
"정말 맞는 말이지요. 요즘 딸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니깐."
적당히 술이 오르자 김과장은 뚱뚱하고 자그마한 키를 흔들며 벌게진 얼굴로 포장마차를 나왔다. 거리는 어둠이 내려앉아 색색의 네온등들이 더욱더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잠시후 이리저리 골목길을 휘두르던 김과장은 조금은 멋쩍은 얼굴로 '로망스'라고 쓰여진 간판 안으로 빨려 들듯
들어갔다. '로망스'는 일종의 러브 호텔이었다.
"아 사장님 아니세요. 기다렸습니다."
이십대 중반의 보이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잠시 후 방으로 안내된 김과장은 다짜고짜로 보이의 허릿춤으로 시퍼런 만원 짜리 한
장을 찔러 넣으며 거칠게 속삭였다.
"야. 너 아까 한 약속 잊지 않았겠지."
"아 김사장님도 성미도 급하셔. 금방 불러 드릴 테니 잘좀 해 주십쇼."
주머니의 팁을 확인한 보이 녀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야야, 근데 말이다. 정말 스무살을 갓 넘긴 영계에다가, 에 그 뭣이냐. 대학생이 맞는감."
"아 그럼요. 제가 돈 받고 뭣하러 거짓말하겠습니까. 다들 알아주는 일류대에 쪽쪽 빠진 애들이에요. 요즘은 그렇게 감쪽같이 하루에 한두껀씩
아르바이트 삼아 몸을 파는 애들이 한두명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자기 옷도 사 입고 용돈도 하고 학비도 내고 남자 친구 밀린 하숙비도 내주고.
요즘 애들이 얼마나 약았는데요."
"캬~ 기가 막힐 노릇이군. 여기 돈 있으니 어디 그 중에서 제일 기가 막힌 놈으로 한번 불러 봐라."
"예, 예, 그러문입쇼."
보이가 나간 후 김과장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욕조에 물을 받고 옷을 훌라당 벗어 던진 채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실 김과장이 이 여관에 드나든지도 어언 일년이 다 되어 갔다. 마누라한테 싫증이 나도 벌써 날 나이였지만 말년 과장에 변변치 못한 외모 때문에
그럴싸한 바람 한번 피워 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우연히 알게된 곳이 이곳이었다. 전에는 주로 전문 콜걸들과 일부 집안이 가난한 여성들이 낮엔
회사에 다니고 밤엔 몸을 팔았고 그 맛에 그럭저럭 회포를 풀며 지내 온 그였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여관 보이 녀석으로부터 정말 반가운 전화가
왔던 것이다.
"아 글쎄 말입니다. 대학생 몇년이서 그 짓을 하겠다고 찾아왔지 뭡니까.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재발로 걸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특별히 김사장님께 전화 드린 겁니다."
"어 어 험. 그래 그래."
전화를 받으며 김과장은 떨리기까지 했다. 세상 정말 말세로다.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는 더러운 놈의 기집년들. 어찌됐든 좋도다. 그래야 우리
같은 놈들도 영계 구경하며 살맛 나게 세상을 살지...
대충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김과장은 흐뭇하고 흡족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서 잠시 후의 일을 회상했다. 꼬깃꼬깃 마누라 몰래 감춰 두었던
비상금을 화대비로 모두 날렸지만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저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스물도 채 되지않은듯한 가녀리고 어린 목소리 였다.
"네에, 들어오시죠."
그는 다소 점잖은 목소리로 그러나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다가가 문을 열었다. 붉은 취침등 밑에 드러난 소녀의 옆모습은 보이의 말대로
어리고 청초해 뵈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창피했음인지 뒤로 돌아서서 입고 있던 옷들을 한커풀 두커플 벗어 던졌다. 불빛을 타고 인어같이
완벽한 그녀의 나신이 마치 꿈을 꾸듯 김과장 앞으로 넘실거렸다.
"아악... 더 더는 도저히 못참겠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김과장은 방안의 불을 환하게 바꾸고는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까무러치듯 놀란 두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잡았던 몸을 놓고 뒤로 나자빠졌다.
"앗- 아.. 아빠얏!"
"아악.. 미...미영아..."
이 참으로 우연하고도 불행한 비극의 덫에 걸린 두 부녀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해 듣지 못했다. 당시 종업원의 말을 빌리면 그
김과장이란 사내는 딸이 방문을 밀치고 도망치듯 여관을 빠져나간 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줄담배를 피워 대며 그 자릴 떠날 줄을 몰랐다고 한다.
애지중지 금지옥엽 키워 놓은 딸이 그렇게 물질 만능에 쫓겨 타락해 가고 있음에 그는 눈물을 흘렸으리라. 더군다나 자신 또한 아버지로서의 모든
인격을 무너트린 채 그렇게 더럽고 추한 모습을 딸에게 들키고 말았으니...

셋째 이야기: 남자 좀 불러 주세요

"아저씨! 여기, 남자 좀 불러 줄 수 있죠?"
호텔 객실에서 걸려 온 여인의 전화에 프런트 데스크에서 전화를 받던 성일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옛! 뭐...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이, 이 아저씨 눈치 되게 없기는... 이 방에 남자 하나 불러 달라고요."
"아 예 손님, 그런 건 곤란하군요. 이 밤에 어디 가서 남자를 불러드립니까."
"아니, 여관에 남자가 그렇게도 없단 말입니까?"
"남자들이 없기야 하겠습니까만, 숙박 업소에서 매춘 행위를 알선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손님."
전화기에서 잠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 나왔다. 목소리로 보아서 여인은 서른 중반쯤의 나이인것 같았다. 그런데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여관에 와서
남자를 불러 달라니. 성일은 의아스러웠다. 기실 남자들이 술 한잔씩을 걸치고 췻김에 여관에 와서 여자를 찾는 일은 이따금씩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찾는 일은 여관종업원 생활 10년 경력의 성일로서도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여인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이 아저씨 되게 멋대가리 없네. 누가 남자를 알선해 달라고 했어요? 그냥 아무라도 좋으니 남자 하나만 불러 달란 말입니다. 화대를
주고받는 일도 아닌데 뭐 법에 걸릴게 있다고 자꾸 그래요"
"아... 예 예,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드리죠."
갑작스레 야기된 사태에 서둘러 전화를 끊은 성일은 손님 안내 일을 보고 있는 진수를 불렀다.
"이봐! 미스터 조. 303호 손님 대체 누구야? 여자 손님인데 남자를 불러 달라는군."
군대를 갓 제대하여 아직 머리가 짧은 스포츠 머리 그대로인 진수가 마악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데스크로 걸어왔다.
"남자를 불러 달라고요? 세상에 별꼴을 다 보는군요"
".그렇게 말하지 말고 자세히 설명을 해봐! 잘하면 좋은 건수가 될 수도 있잖아."
"그 손님, 전에도 가끔씩 남자와 오던 손님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혼자 왔다 했더니 그 남자에게 바람을 맞았나 보군요."
"제길, 그럼 맨 정신으로 그런 단 말야. 술도 안 마시고..."
"아니, 술은 들어올 때부터 조금 취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시간 전에 또 맥주 몇병을 시켜서 가져다 주었고요."
"그래, 그래도 그렇지...."
"생각 있으면 형이 한번 가보시구려.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불쌍한 아줌마의 외로움을 잠시 덜어 주는 것도 다 보시가 아니겠어요."
"이런 큰일날 소리를 하고 있군, 우리 마누라 알면 집에서 쫓겨나는 꼴을 보려고 그래. 아무튼 내가 이 불야성 호텔에 입사한지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그리고 여관에 와서 혼자 저러는 여자들 잘못 건드리면 꼭 뒷탈이 나기 마련이지. 전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어. 술에 취해 남자의 등에 업혀 들어와 강간을 당해 놓고는 술이 깨자 종업원들의 소행이라고 벌컥 신고를 했지 뭐야! 결국 그 남자 친구의
범행으로 밝혀져 누명은 벗었지만 의외로 한심한 여자들이 부지기수라구."
성일의 말에 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을 구하던 차에 우연하게도 숙박업소로 발길을 들여놓기는 하였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서툴기 그지없었다. 늘상 그런 진수에게 자랑스레 10년 경력을 내세우는 성일이었다.
"형 말이 아무래도 일리가 있군요. 그렇게 생각하니 여자들이 무서워지는군요."
"그래, 이 여자도 적당히 달래 보아야겠군. 괜히 건수 잡으려다 신세 망치는 수가 있지."
성일은 곧바로 303호로 전화를 했다.
"예, 손님 프런트 데스큽니다. 제가 알아보았는데요. 아무래도 좀 곤란하겠군요. 직원들도 모두 지금 바쁜 시간 이라서요. 외로우시더라도 한숨 푹
주무시면 나아지실 겁니다."
잠시 후 여인의 성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아저씨가 지금 장난을 하나?"
"네. 장난을 하다뇨?"
다시 여인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잘 하시고 여기 맥주나 몇병 더 같다 주어요. 마시고 푹 잘 터이니..."
"예. 그거야 어렵지 않죠.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
'괜히 좋은 건수 하나를 놓치는구나.'
전화를 끊은 성일은 후회의 마음도 들었지만 곧 자신의 결정이 현명했다는 판단을 했다. 이런 여자 잘못 건드려 낭패를 본 경험이 어디 한두번
이었던가. 성일의 눈가에 낯선 여인의 신비로운 향취가 아련히 떠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지워 버렸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궁금하다는 듯 진수가 다가오며 물었다.
"꿈깨시고 일이나 해. 다 끝났으니까. 맥주나 몇병 더 가져다 달라는군. 마시고 자려나 보지. 서서히 열기를 식히면서."
"하하하... 맥주라... 그건 얼마든지 줄 수 있죠."
'젠장. 직업을 바꿔야겠군. 어쩌다가 내가 이런 여자들의 술 뒷바라지나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을까. 이래봬도 명색이 군대까지 갔다온
몸인데...'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 든 진수는 곧바로 303호실로 올라갔다.
"손님. 룸 서비습니다."
"잠시만요."
노크를 하자 방안에서 끈적끈적한 여자의 대답이 이어졌다.
"들어오세요."
"앗!"
다음 순간, 쟁반에 맥주를 받쳐들고 문을 열던 진수는 당황해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여인이 하얀 속옷 위에 아이보리색 슬립만을 걸친채로
태연하게 문을 열고는 빙긋이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 손님... 옷을 입으셔야죠."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군대를 제대하고 어언 꺾어진 20대라고 자부하던 진수였지만 그동
안 여자 경험이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였던지라 얼굴이 붉어지며 뒤로 주춤거렸다.
"에이 왜 이래 창피하게, 그 나이에 여자 속옷 한두번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그 표정은 또 뭐야. 복도에서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방으로 맥주를 가지고 들어와요."
여인의 당돌한 말에 기선을 제압 당한 진수는 엉겁결에 맥주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빨간 색 스탠드 불 하나만이 켜져 있는 방안은 마치 진수를
기다렸다는 듯 색색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맥주를 내려놓고 잠시 여인의 육체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진수에게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 뭐 해요, 앉지 않고, 건물 바치고 서 있으려고 그래요?"
"예. 저는 바빠서요. 내.. 내려가 봐야 하거든요."
"참나,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답디까. 애인한테는 바람을 맞고 혼자 처량히 있으려니 잠이 안 와서 그래요. 별다른 뜻은 없으니 이왕 들어온거
맥주나 한잔 마시고 가세요?"
"근무 중엔 술을 못 마십니다."
"에이 근무는 무슨, 여기가 철책선 이라도 된답니까? 딱 한잔만 하세요. 더는 권하지도 않아요"
여인은 영화 속의 샤론스톤처럼 다리를 꼬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때야 비로서 진수는 여인을 천천히 흩어 볼 수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어깨에까지 늘어트린 긴 생머리. 서른 중반쯤의 나이답지 않게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바람 맞춘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진수는 여인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제가 참 바보처럼 보이죠. 미친 여자 같지 않아요?"
진수의 잔에 맥주를 부으며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제 남자는 지금쯤 다른 여자를 만나 침대를 뒹굴고 있을 거예요. 오늘 여기서 날 만나기로 해 놓고는 개자식, 그전부터 따라붙던 젊은
년이 만나자고 하니까 그리고 달려간 거죠. 내겐 이렇다 할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지요. 뻔히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알면서. 그래서 난 배신감에 몸부림을 쳤지요. 아까 남자를 불러 달라고 한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죽고
싶은 그 심정 이해하시겠어요? 그렇게 라도 해야 마음 속에서 용서가 될 듯 싶었지요."
"그런 딱한 사정이 있었군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넘겼다. 하지만 성숙한 여인의 반나신을 바로 코앞에 두고 태연하게 앉아 있자니 속에서 한 움큼씩 불길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의외로 여인의 사유는 간단했다. 애인의 바람에 맞바람으로 복수를 하고 싶은 심리. 여인은 오직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을
것이다. 여인에겐 지금 남자가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복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쉽게 내 던질 정도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이토록 무섭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식의 복수라니 참으로 이상한 복수가 아닌가.'
진수는 일도 잊어버리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총각은 몇 살이나 먹었지요? 얼굴도 꽤 미남이군요. 몸도 튼튼해 보이고..."
그러고 보니 마른침을 삼키는 건 진수만이 아닌 듯 했다. 여인의 눈길이 묘하게 진수의 아래위를 흩고 지나갔다.
"예. 전 스물 여섯입니다. 몸이야 군에서 3년동안 체력 단련만 했으니 이리 될 수밖에 없죠. 전엔 약골이었걸랑요."
"그럼 여자 경험은 있겠군요. 얼굴이 이렇게 미남이니 당연히 여자친구도 있겠고..."
"그 그야... "
진수의 얼굴이 벌개짐을 여인은 놓치지 않았다. 여인이 지금 무엇에 목적을 두고 있는지를 직감한 진수의 호흡은 갈수록 빨라져 갔다. 여인은 진수의
젊고 건장한 육체를 보자 복수심 위에 또 하나를 얹어 색기마저 발동했는지도 몰랐다. 단숨에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운 여인이 갑자기 입고 있던 얇은
슬립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던 그녀가 술기운이었는지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괘... 괜찮으세요?"
여인의 의도 따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달려든 진수가 여인의 몸을 부축했다.
"아, 어지러워요. 저 좀 침대로 부축해 주시겠어요. 쉬고 싶군요."
여인의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이 진수의 얼굴을 짓누르며 뒤이어 풋풋한 살내음이 코를 자극시켰다. 그녀의 몸은 익을 대로 익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따 주기를 기다렸던 농익은 과일처럼. 이미 이성을 잃은 진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몸을 침대에 눕힌 후 젖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아.."
짧게 신음 소리만을 토할 뿐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오히려 등뒤로 그런 진수를 힘껏 끌어 앉는 것이 아닌가?
그런 모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러브호텔 불야성의 밤은 더욱 깊어 가고 있었다.

러브호텔 2

넷째 이야기: 립스틱으로 쓴 유서

사람들이 자살을 할 때 그 죽음의 순간을 택하는 장소도 참으로 다양하다. 멀리 여행을 떠나서 낯선 여행지의 강변이나 호텔 방, 혹은 유람선의
달리는 뱃전 위에서 그 생에 마감의 순간을 가질 수도 있고, 더러는 집에서나 아니면 자신이 처한 가장 어려운 환경의 한 가운데가 될 수도 있다.
그 여러 유형의 죽음 가운데 낯설은 여관방에서 생의 죽음을 택한 한 여인의 소설처럼 슬픈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잠실 종합운동장을 지나
한 정거장을 더 내려가면 신천 전철역이 나오고 그 뒤로는 최근 요 몇년 사이 젊은이들의 거리가 되어 버린 화려한 유흥가 골목이 펼쳐 있다. 이
곳은 또한 인근의 야구장과 한강 시민공원 롯데월드 등이 인접해 있고 편리한 교통 여건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일명 뚜벅이거리라고
불리우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유흥 시설들이 즐비하다 보면 시내 어디를 가도 공통적인 것이기는 하겠지만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에는
반드시 화려한 네온 등들을 앞세운 러브호텔의 불빛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기 마련이다. 이 곳도 마찬가지여서 각종 술집과 포장마차 노래방
단란주점등이 늘어선 거리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그 길이 끝나는 지점을 기점으로하여 여관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취하고 지친 그대들을
기다렸노라' 하고 말하듯 사랑하는 연인들이 기분 좋게 한 잔씩을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길을 나서면 자연스레 여관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그 어느 늦은 가을,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흩뿌리던 날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영업 시간이 끝난 술집의 손님들이 하나 둘씩 가게문을 나와
삼삼오오 집으로 혹은 포장마차로 흩어질 무렵 술에 잔뜩 취한 연인 한 쌍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흐느적거리며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여인은 검정색 투피스 차림에 이십대 초반의 청순하게 생긴 얼굴이었고 그녀의 팔을 부축한 남자는 큰 키에 귀공자 풍의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잔씩 걸친 술로 인하여 취해 있었기는 마찬가지 였고 어느 누구도 두 젊은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인은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기는 했지만 제법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영준씨! 제발... 절... 절 떠나지 마세요? 네, 부탁이에요.... 흐흑..."
"미혜... 어쩔 수 없잖아... 부모님의 뜻인걸... 그리고 날 이젠 잊어 줘...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흥, 영준씨가 떠나면 전 차라리 죽어 버릴 거예요.... 영준씨는 부모님의 뜻이라 하지만 사실은... 저를... 사랑하지 않고 있어요.
그렇죠?"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누구보다도 미혤 사랑했다구.. 다만 지금은 부모님의 뜻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지.... 난 그분들의
희망이야."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걷던 두 남녀는 잠시 후, '파라다이스'라고 써진 모텔의 현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많이 오나 보군요?"
두 남녀를 아래위로 흩어 보던 종업원 미스터 박은 형식적인 말을 건네며 엘리베이터에 그들을 태웠다.
"아저씨! 몇 층입니까?"
"예, 6층 607호실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꼭 부둥켜안은 남녀는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방으로 그들을 안내한 미스터 박은 별 생각없이 요금을 받은 후 방문을 닫아 주고 프런트로
내려왔다. 그리고 긴 밤이 흘렀다. 다음 날 오전 12시, 통상 이때쯤이면 숙박 업소의 대부분은 그때까지도 방을 비우지 않은 손님들에 한하여
일일이 전화로 체크아웃을 시킨다. 청소를 시작하고 새로이 들어 올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함에서였다. 일일이 체크판을 들고 나가지 않은 손님들을
체크하던 미스터 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607호 말이야. 안에 손님이 분명히 있는데 전화를 안 받는단 말씀이야."
"잠에 취해서 그렇겠지. 다시 한 번 전화를 해 보세요."
걸레질을 하던 프런트 케쉬어 미스 리가 거들었다.
"글세.. 어제 저녁에 술에 취해서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금쯤이면 술이 깨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이상하네."
"문을 마스터키로 따 보면 되잖아요?"
"에이, 누가 그걸 모르나. 손님 방 함부로 열었다가는 큰일 나니까 하는 소리지. 가뜩이나 술 취해서 믈건 잃어버리면 종업원 소행이라고 우기고
신고하는 판인데... "
"훗훗,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에잇! 더러워서. 빨리 돈 벌어서 뭐라고 차리던가 해야지. 그나저나 607호실은 문제군. 문을 열어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 요즘 젊은것들은
문제야. 대낮인데 출근도 안 하나."
미스터 박은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후 607호실 앞에 이른 그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젠장, 전쟁이 일어나도 모를 판이군."
조심스레 마스터키로 객실 문을 연 미스터 박은 손님이 깰 까봐 조심하면서 마치 영화 속의 미 정보국 CIA요원이 된 기분으로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커튼이 드리워진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문 입구에 여자 구두 한 켤레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으나 손님은 없는 듯 했다.
"젠장, 여기가 무슨 쓰레기장인줄 아나. 줄줄이 버리고 가게스리. 그나저나 괜히 놀랬네."
완전히 손님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투덜거리며 커튼을 열어 젖혔다. 여관에 와서 새로 산 신발이나 옷가지들을 갈아입고 헌 것들은 버리고 가는
경우는 그전에도 종종 있던 터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조금씩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앗,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갑자기 풍기는 역한 비릿내에 깜짝 놀란 미스터 박은 조심스레 욕실문을 열었다.
"아악"
다음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닫혀진 욕실 안에는 참으로 처참한 풍경이 벌어져 있었다. 긴 머리를 어깨에까지 늘어트린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동맥을 절단한 채 욕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음인지 물
속에서는 아직도 더운 피가 뭉클거리며 솟아나고 있었다.
"여... 여보세요..."
정신을 차린 미스터 박이 달려들어 여인의 몸을 흔들었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한평 남짓한 욕조 주변에는 여인이 밤새 피우다 만
담배꽁초들과 손톱 소재용 화장칼 하나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타일 위에 걸려 있던 욕실용 거울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망설임 속에 썼을
법한 몇 자의 글씨가 빨간 매니큐어로 흔들리듯 쓰여져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용서하세요. 불효자는 먼저 떠납니다...
얼마 후 경찰이 달려오고 사건의 전모는 밝혀졌다. 어제 밤에 같이 여관에 들어 왔던 남자와 여인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것도 죽고는 못 살
정도로. 그렇지만 사랑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즉 남자는 유명한 대기업의 외동아들이었고 여인은 평범한 가정의
대학생이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는 부모는 마침 다른 기업의 외동딸과 자기 아들이 맺어지길 원하였고 자기 아들이 평범한 여인과
사귀고 있음을 눈치 채고는 그 대기업의 외동딸이 유학하고 있는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별의 마지막 날, 그 남자는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비행기에 올랐으리라.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인의
품으로 떠나버린 아침, 그 여인은 세상을 절망하며 동맥을 끊었으리라. 참으로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창작된 이야기가 어차피 현실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모티브를 두고 있기에 더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 여인의 시신이야 화장이
되고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겠지만 그 사랑의 마음이 어떠했기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전해들은
순간부터 줄곧 필자는 가슴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다섯째 이야기: 남편을 찾아라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부인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모텔 불야성의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새벽 여섯시, 뿌옇게 콘크리트 빌딩 숲을 헤치고
아침 여명이 밝아 올 시각이었다. 부인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꽤 미인형의 얼굴이었지만 무언가에 쫓기듯 계속 해서 안절부절못한 모습이었다. 당직근무
중이던 성일이 깜짝 놀라 졸린 눈을 비비며 부인에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부인은 물을 한컵 청한 후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 여기가 불야성이 틀림없죠?"
"네, 맞습니다만..."
"저.. 아저씨 부탁입니다.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난데없는 부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성일은 다시 물었다.
"손님, 진정하시고 말씀을 해 보세요. 도대체 무엇을 도와 달라는 말씀이신지요."
"지금 혹시 손님 중에 강혜숙이란 여자가 있는지 확인 좀 해 주시겠어요. 아마 307호실 일거예요."
"확인이야 어려울 거 없겠지만 그 전에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셔야죠. 저희가 무턱대고 손님들을 알려드릴 순 없잖습니까? 저희에게도 어느정도 손님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잖아요."
"흐흑... "
잠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부인이 잠시 후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자기 남편이 직장을 핑계로 사흘이 멀다하고
외박을 하며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부인이 이혼할 것을 요구하자 오히려 증거를 대라며 부인을 구타하고 의처증으로
몰아 세웠다. 할 수 없이 증거를 찾으려 전화기에 도청 장치도 해 보고 사람을 시켜 남편의 뒤도 밟아 보았지만 워낙 주도면밀한 성격의 남편은
그때마다 교묘하게 추적을 빠져나갔다. 그러기를 석달째 되던 어제 오후, 드디어 남편의 꼬리가 잡혔다. 우연찮게 남편의 삐삐 비밀 번호를
알아내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어제 오후, 남편은 지방 출장을 간다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묘령의 여인이
남편의 삐삐메시지에 음성녹음을 남긴 것이다.
"그래, 뭐라고 녹음이 되어 있었던가요?"
궁금해진 성일이 재차 물었다. 그럴수록 부인의 모습이 참으로 측은해 보였다.
"새벽 네시쯤 일겁니다. 이 여관 307호실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 였어요. 그 강혜숙 이라는 여자, 이미 짐작은 했던 여자죠. 남편과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여자거든요. 각본대로 라면 교활한 남편은 지방에서 새벽에 서울로 올라와 곧장 이리로 달려올 겁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멍 투성이인 몸의 상처들을 보여 주었다.
"이게 다 그놈한테 의처증이라고 얻어맞은 상처들이에요. 꼭 좀 도와주세요. 이번에도 현장을 잡지 못하고 놓친다면 저와 아이들은 끝장이랍니다."
"숙박계를 보니 307호실에 강혜숙이란 여자가 틀림없이 묵고 있군요. 그런데 부인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 남편은 상상외로 교활한 인간입니다. 조금만 이상해도 자릴 떠버리기 때문에 몇번이나 현장을 놓쳤지요. 남편은 한번 갔던 여관에 두번 다시
가는 일이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잡니다. 저는 사람들과 멀리서 기다릴 테니 남편이 들어가면 곧바로 제게 호출을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사람들을 데리고 곧 달려올 겁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자신의 호출 번호와 함께 남편의 사진을 내밀었다.
"그렇게 하지요. 너무 걱정 마세요. 잘 될겁니다."
부인이 사라지자 성일은 잠시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만에 하나 부인의 말이 거짓이라면... 더구나 종업원은 일단은 자신의 여관에 묵은 손님을
보호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업주는 시끄러운 일이 생기고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일은 절대로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온몸이 멍 투성이인 부인의 애절한 눈빛이 떠올랐다. 적어도 부인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두시간여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아침 아홉시가 조금
못 되어 드디어 그 문제의 남편이 여관 문을 조심스레 밀치고 들어섰다.
"손님! 누굴 찾아 오셨습니까?"
식은땀이 흘렀으나 태연한 얼굴로 성일이 물었다.
"307호 갑니다."
남자가 짧고 굵은 바리톤 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남자가 사라지자 종업원 성일은 서둘러서 부인의 호출 번호를 눌렀다. 000번,
그것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부인과의 약속된 암호였다. 잠시 후, 오분이 채 못되어 사복 차림의 경찰관 두명을 데리고 부인이 나타났다. 작은
카메라를 손에 든 부인의 두 손은 자꾸만 떨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서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 한사람의 인연으로
맺어진 인연이리라. 그러나 그 사랑이 자식까지 낳은 마당에 차가운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서고 있을 때에 부인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더군다나
다른 여자와 부둥켜안고 침대를 뒹굴고 있을 그 현장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 마당에. 분노에 와들와들 떨고 있는 부인을 대신하여 대동한
경찰관이 차분히 307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잠시 인검이 있겠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안에서 앙칼진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누구세요?"
하지만 대답 속에는 분명히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네, 인검 중인 경찰관입니다. 문 좀 열어 보세요."
곧이어 문이 열리고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자 하나가 급히 겉옷만 껴입은 채로 얼굴을 내밀었다.
"저리 비켰! 이 더러운 년!"
남편과 함께 있는 새파란 여자를 보자 분노가 치민 부인이 여자의 몸을 밀치며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곧 이어 경찰들도 뒤를 따랐다.
"앗! 어떻게 된 일이지?"
부인이 먼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찌된 영문인지 방안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할 무렵, 문 한켠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흥, 뭣들 하는 거죠? 경찰이면 답니까? 민주 경찰은 이렇게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 보죠. 어서 썩 들 나가세요!"
당황한 경찰관이 종업원들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금방 307호실로 올라 간 사내가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그러나 물러설 경찰이 아니었다.
"이봐요 아가씨! 시치미 뚝 때면 모를 줄 알고, 이거 왜 이래. 다 알고 왔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간 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만약 증거를 찾지 못하면 불법침입죄로 모두를 고소하겠어요."
너무나도 당당한 여자의 태도 였는지라 모두들 엉거주춤 방을 나왔다.
"이봐! 잘못 짚은 것 아냐?"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진 속의 그 남자 였어요. 307호실로 간다고까지 말했는걸요."
"젠장,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바로 그때였다. 방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무엇인가 둔탁한 것이 땅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앗! 창문입니다. 빨리 밖으로 나가세요."
짚이는 데가 있는 듯 성일이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밖으로 달려나온 일행은 모두들 놀라며 얼굴을 가렸다. 창밖 여관 건물 앞 화단 위에는
아까의 그 남자가 의식을 잃고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경찰과 부인이 간통의 현장을 덮친 순간, 당황한 그 남편은 창문 밖으로 몸을 숨겼고
베란다에 매달려 있다가 힘에 겨워 밑으로 추락했던 것이다. 다행이 떨어진 곳이 콘크리트가 아닌 화단이었던지라 남자는 다리가 부러지고 두어군데
찰과상을 입은 것으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이후, 두 부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헛된 한 순간의 욕망이 초래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려
유부남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 주고 싶다. 자기 남편이나 부인 몰래 다른 사람과 한 순간 피워 올리는 불장난은 자칫
스릴 있고 쾌감이 따를지언정 입장을 바꾸어서 자기의 부인이나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를... 결코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섯째 이야기: 잠복 근무

연일 계속되는 도둑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모텔 불야성의 종업원들은 지칠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철통같이 순찰을 돌고 객실
점검을 해도 얼굴을 모르는 도둑은 요 며칠 사이 계속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손님들의 방을 털어 가곤 했던 것이다. 손님들이 술에 취하여 객실
문을 열어 놓고 자다가 가끔 도둑을 맞는 일이 있긴 했었지만 일년에 한두번 어쩌다가 있는 일이었지 요즘처럼 자주 발생하지는 않았었다. 최근 한달
여를 기점으로 하여 근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어김없이 손님들의 방이 털리곤 하자 사장은 드디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손님들에게 일일이 귀중품은
프런트에 맡기게끔 하였고 문을 걸고 잠을 자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전 종업원이 교대로 순찰을 돌고 몽둥이를 들고 지키게 했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 였다. 범인은 귀신처럼 문을 따고 손님들의 지갑을 훔쳤고 급기야 조사하던 형사들은 이를 내부의 소행으로 단정 애매한 종업원들만
조사를 벌이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종업원들은 오해를 풀고 범인도 잡기 위해 사장에게 CC-TV와 카메라를 설치하자고 건의를 하였지만
구두쇠 사장은 돈 드는 것이 싫어 그것을 묵살하고 형사들과 한편이 되어 오히려 종업원들을 물갈이 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평화스러워 보였지만 그렇게 차가운 전운이 감돌고 있는 모텔 불야성에 지방에서 서울로 범인 검거차 출장 왔던 박형사가 들어선 것은 자정이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방 하나 있습니까? 피곤해서 잠 좀 자야겠습니다."
유도로 딱 벌어진 어깨에 서른을 갓 넘긴 박형사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인을 잡기 위해 며칠째 잠복 근무를 하다가 허탕을 치고
내일 첫차로 일찌감치 본부로 내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얼마 안되는 수사비를 쪼개어 여관을 찾은 터였다. 범인의 집 앞 벽돌 담아래서 삼일 밤낮을
쪼그리고 보낸 터라 뜨거운 목욕과 따스한 잠자리가 간절했다.
"저... 혼자 주무실 겁니까?"
박형사를 위 아래로 예리하게 흩어 보던 종업원 성일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안 그래도 도둑 때문에 긴장되던 터에 남자 혼자 오는 손님은
무조건 경계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놈들아! 여자 남자가 여관에 연애하러 와서 할일 없이 남의 방을 털겠어. 이건 필시 남자 혼자 오는 놈의 소행 일거야. 오해받기 싫으면
잡아! 못 잡으면 너희들 소행으로 알겠어."
얼마 전까지 악다귀를 늘어놓다가 퇴근을 한 사장의 말도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도둑은 필시 남자일 것이다. 그리고 도둑이 외부에서 침입 하리란
법만은 없었다. 손님으로 가장해서 방을 잡고 기다렸다가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살며시 일어나 다른 방들을 따고 지갑을 훔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왜, 남자 혼자 자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피곤해 죽겠으니 어서 방이나 하나 줘 봅시다."
종업원의 말이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박형사는 참기로 했다. 어서 따근따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뜻은 아니구요. 혹시 여자 손님 오시면 안내를 해 드려야 하니까, 헤헤... 해서 물어 본 겁니다."
이상한 예감을 억누르며 성일은 미스터 조를 불렀다.
"미스터 조? 손님 오셨으니 방 좀 하나 안내해 드리세요."
"예, 이쪽으로 오시죠. 침대로 드릴까요? 온돌로 드릴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버튼을 누르며 진수가 물었다.
"혼자 잘건대 침대는 뭐합니까. 따듯한 온돌로 하나 주세요. 일자릴 구하느라 온종일 돌아 다녔더니 피곤하군요."
박형사는 짐짓 거짓말을 했다. 정말로 그의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해 보였다.
"어디, 이상한 낌새는 없던가. 미스터 조?"
진수가 안내를 하고 내려오자 프런트를 보던 성일이 성급히 물었다.
"별다르게 이상한 점은 없던데요. 그 나이에 캐주얼복 운동화 차림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자꾸 피곤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기도
하고... ..."
"틀림없어. 뭔가 있다구. 이래봐도 내가 프런트 경력 10년째야. 척보면 손님들의 마음쯤은 읽을 수가 있지. 지금까지 예감이 빗나간 적은
없었어. 아무튼 졸지 말고 신경 써서 보자구.이번에 한 번 더 도둑을 맞았다 간 우리 목이 성치 않을 거야."
"제길... 무비카메라 한대 달면 해결될 문제인데 직원들끼리 서로 의심이나 하고 이 기회에 직업을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봐! 그건 둘째 문제야. 어쨌든 도둑놈을 빨리 잡아야지. 참, 그 방 말야. 남자 혼자 올라간 방. 문에 표시를 해 두지 그래. 문을 열고
다른 방을 돌아다니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표가 나게끔. 문틈에 성냥 한개를 끼워 놓으라구. 문을 열면 밑으로 떨어질 테니 표가 나겠지."
"참, 그거 좋은 아이디어군요."
성일은 오늘은 왠지 그 동안 속을 썩이던 도둑이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돈을 변상해 주고 경찰서를 들락거리던 그 동안의 일들이
생각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나 둘씩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드디어 운명의 밤이 깊었다. 새벽 다섯 시, 마지막으로 객실 점검을
하고 진수가 프런트로 돌아왔을 때 성일은 피곤했던지 전화 교환대에 코를 박고 잠에 빠져 있었다.
'쯧쯧. 저러니 도둑이 와도 털릴 수밖에 없지.'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곁에 내려놓고 혀를 끌끌 차던 진수도 이내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객실
문도 모두 굳게 닫아져 있었고 여관 후문 쪽에 있는 비상구도 아예 닫아 걸어버렸다. 화재나 비상시를 대비하여 열어 놓아야 할 비상구 였지만 밤에
잠 안자고 소방서에서 소방 검열을 나올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모텔 맨 위층에 위치한 7층 709호실의 문이 열리고 복면을 한 두 그림자가 소리 없이 복도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709호실에 일찌감치 손님으로 가장하여 방을 잡았던 인물들이었다. 한 명이 손짓을 하자 다른 한 명이 재빠르게 계단을 이용하여 1층에 있는
프런트로 달려 내려갔다.
"그래, 어때? 깨어 있나?"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있어요. 탁자를 두드려도 모르더군요."
"자식들! 그러면서 무슨 도둑을 잡겠다고..."
어둠 속의 두 그림자는 킬킬거리면서 행동 개시를 했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롭고 조잡한 모양의 만능키가 들려져 있었다. 두 그림자는 살며시 그러나
능숙한 폼으로 7층부터 객실의 이중 안전고리가 걸리지 않은 방을 중심으로 방을 열고 잠에 떨어져 있는 손님들의 지갑만을 털면서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딸각-"
한편, 자정 무렵부터 잠에 취하여 정신없이 잠에 빠졌던 박형사는 새벽이 되어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마악 잠을 청하는 순간 밖에서
들려 오는 이상한 소리에 본능적인 감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숨을 죽였다.
"딸각-"
잠시 후 두어번의 문 비트는 소리와 함께 살며시 문이 열리며 검은 물체 하나가 소리 없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전혀 소리가 없이 그 모습은
마치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박형사는 순간 도둑임을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쳤겠지만 박형사는 동물적인 감각과
오랜 수사 경험에서 얻은 베테랑다운 솜씨로 오히려 코를 골아 가며 자는 시늉을 했다. 물론 작게 실눈을 뜨고 도둑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지만
어두워서 도둑은 방안의 사람이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증거를 포착해야 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잠시 방안의 동태를 살피던 도둑이
살며시 박형사의 청바지 주머니를 열고 지갑을 꺼내었다.
"꼼짝 마!"
다음 순간, 범인을 제압하기 위한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박형사의 곰 같은 육중한 몸이 도둑의 몸을 덮쳤다. 놀란 도둑의 비명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격투가 이어졌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박형사가 어둠 속에서 날렵하게 수갑을 꺼내 도둑의 손에 채우고 불을 켰을 때 박형사의
팔에서도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둑이 휘두른 나이프에 스친 듯했다.
"앗-"
도둑의 두건을 벗긴 박형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도둑은 뜻밖에도 갓 이십대 초반의 아리따운 아가씨 였던 것이다. 손님으로 왔던 박형사가 어여쁜
아가씨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프런트로 내려오자 성일과 진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앗!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분은 우리 집 단골 손님인대요."
"어떻게 되긴? 빨리 경찰을 불러요. 도둑이 다행이 내 방으로 들어왔기 망정이지. 큰일날뻔했지 뭡니까."
자기의 애인이 잡히자 그와 같이 있던 그녀의 남자 친구도 순순히 자수를 했고 얼마 후 사건의 전모는 밝혀 질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애인 사이로
공고를 졸업한 남자 친구가 열쇠 따기에 남다른 제주가 있던 점을 이용하여 애인 사이로 가장 여관에 든 후 만능키로 닫혀진 객실 문을 열고 돈을
털어 왔던 것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사장이 박형사를 보고 고개를 구십도로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고맙긴요. 제 일인 걸요. 그나저나 쉬는 시간까지 잠복근무의 연장이니 웃어야 겠지요. 편히 발 뻗고 쉴 날이 없구려."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 박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모텔 불야성에서는 더 이상 도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러브호텔 3

일곱째 이야기: 어느 제비족의 말로

"방 있습니까?"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어느 토요일이었다. 아직은 손님이 뜸한 초저녁,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여관 불야성의 문을 밀치며 들어섰다.
"예, 그럼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손님?"
종업원 진수의 안내를 받아 객실로 향하는 사내는 훤칠한 키에 검정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미남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팔짱을 낀
여자는 저녁인데도 검정색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작은 키에 뚱뚱한 몸집을 흔들며 걷고 있었다. 술이 기분 좋게 취한 남녀는 객실 앞에 이르러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에 기대어 부둥켜안고 입맞춤을 했다.
"요금이 얼마죠?"
진수가 방 안내를 마치자 여인을 부축하던 남자가 눈짓을 해 보이며 물었다. 가만히 보니 술에 취한 것은 여자만인 듯 했다.
"숙박료가 삼만오천원입니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빳빳한 만원 짜리 네 장을 꺼내어 진수 앞으로 내밀었다.
"잔돈은 됐습니다. 문이나 꼭 잠가주세요?"
"예, 걱정 마시고 편히 주무세요."
오천 원의 팁을 확인한 진수는 이게 왠 떡이냐 싶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자정이 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여자를 놓아두고 밖으로
나갔던 그 사내가 한 시간쯤 지나서 역시 또 다른 중년 부인 하나를 데리고 문을 밀치며 나타난 것이다.
"아저씨, 방 하나 주세요?"
"........."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진수는 잠시 망설였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틀림없는 아까의 그 남자 였지만 다른 여자를 데리고 이곳에 올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쌍둥이 일지도 모른다.
"예? 예..... 예..."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진수가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의 칠층 버튼을 눌렀다. 칠층의 빈방으로 손님을 안내하기 위해서 였다. 그때였다. 여인 몰래
눈을 찡긋 해 보인 사내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순간, 진수는 그가 오층으로 방을 원하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진수는 아까 그 남자가 얻었던 객실 바로 옆 호실에 또다시 그 손님을 안내했다. 객실을 확인한 사내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도 사만 원의 돈을 말없이 내밀었다.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 두 여자씩이나 데리고 들어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프런트 데스크로 내려온 진수는 의아해 하며 오층 복도를 비치고 있는 보안용 CC카메라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남자는
다시 방을 빠져 나와 처음의 여자가 있는 방으로 옮겨갔다. 정말로 그 남자는 두방을 오가며 두 여인과 정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쳇! 자식, 재주도 좋아. 누군 나이 서른이 넘도록 여자가 없어 장가도 못 가고 이 모양 이 꼴인데 누군 하룻저녁에 두 여자를 품고
자다니.... 에잇 더러워라..."
프런트를 보던 나이 서른의 노총각 성일은 열이 받은 양 담배를 꺼내 피워 대며 투덜거렸다.
"걱정하지마, 형! 내일 저 남자 일어나면 사부님으로 모시고 한번 비결을 물어 보면 될 것 아냐? 걱정은 무슨..."
안내를 맡은 진수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래야 할 것 같군. 무슨 용빼는 재주라도 있는지..."
그러나 이상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새벽 네시쯤 되어 종업원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잠을 쫓고 있을 무렵 그 사내는 태연히 밖으로
나가더니 아침이 다 되어 이번에는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자 하나를 데리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어어.. 종업원들이 놀라 눈을
꿈벅거리며 바라보자 사내는 태연하게 말했다.
"방 하나 주세요"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답을 마친 진수는 이번에는 말 안해도 알겠다는 듯 사내를 데리고 오층으로 향하였다.
"응... 자기야, 춥다... 얼른 들어가자....."
사내에게 착 달라붙은 여인은 연신 끈적끈적한 신음을 내뱉으며 독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까의 방 옆으로 객실을 마련해 주자 그는 이번에도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사만 원을 진수에게 건넸다.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진수는 프런트로 내려와 의자에 몸을 뉘였다. 그렇게
얼마 후, 세번째 여인의 방에서 한시간을 보낸 남자는 다시 두번째 여인의 방으로 그리고 첫번째 여인의 방으로 각각 한시간 정도씩을 머물고는 아침
아홉 시가 되어서 세번째 여인의 방으로 들어간 후 프런트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해 하며 전화를 받은 것은 성일 이었다.
"다른 방에서 말이오. 나 찾는 전화를 하면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나갔다고 좀 전해 주시오. 다음에 연락한다고 하드라고 말이오. 부탁합니다."
"예, 걱정하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남자는 몹시 피곤해 지친 음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하룻밤에 세 여인이나 탐을 했으니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그 토요일, 그렇게 첫 테이프를 끊은 남자는 이후에도 종종 모텔 불야성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상했던 일은 한번 온 여자와는 절대로 두번 다시
여관에 오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는 그 방면으로 상당한 고수의 실력을 가지고 일을 벌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하기를 육개월 여, 어언 단골 손님이 되어 버린 그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때를 같이하여 하루에 한두명씩 잘 차려 입은
부인들이 들어와 그 남자의 종적을 묻는 일도 잦아졌다. 전에도 간혹 그런 일들이 있었으나 사내에게서 적지 않은 팁을 챙긴 종업원들이 모른다고
잡아 땐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사라지고부터 유독 그런 발길들이 잦아졌다. 심지어는 형사들까지 나와서 탐문 수사를
벌여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종업원들 사이에서 아쉬움과 궁금증으로 그 남자가 잊혀져 가던 어느 날, 누군가가 사들고 들어온 연애 잡지의 한켠에
그 남자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현대판 변강쇠 같은 남자의 베일이 낱낱이 벗겨졌다. 세간에 알려진 남자의 이름은 박 아무개. 그는
출소한지 일년이 체 못된 전과 10범의 전문 사기꾼이었다. 형을 받고 이년만에 만기 출소한 그는 또다시 손을 씻지 못하고 이번에는 잠실과 천호동
주변의 카바레를 돌며 교포2세 사업가를 사칭, 수려한 용모와 세련된 말솜씨로 부녀자들을 홀리고 돈과 몸을 갈취 해왔던 것이다.
최근에 우리 나라는 계속되는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하여 하룻밤에 한 남자가 한 여자 데리고 자기도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는 하룻밤에도 건수가 생기면 두명 세명의 여자도 마다 않고 기쁨조를 운용하는 북한의 김일성 부자나 삼천궁녀를 두었던 백제 의자왕 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으니 가히 기가 찰 노릇이다. 기실 그의 목적은 여자들의 몸이 아닌 그녀들이 지녔던 돈이나 값나가는 물건이었겠지만 말이다. 번듯한
말투에 놀아난 여자들이 가진 것을 모두 빼 주고 덤으로 넘겨주는 몸조차 마다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욕심도 많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그가 꼬리를
잡힌 것은 여인들의 돈이나 금품을 갈취해서가 아니라 그를 한 번 만났던 여자들이 다시 만나 주지 않는 데에 앙심을 품고 신고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명단이 밝혀진 여인들은 대부분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하여간에 이러한 제비족
유형의 범죄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데에는 분별없는 여인들의 행실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상대가 돈 있고 번듯해 보이면 앞
뒤 가리지도 않고 줄것 안줄것 다 주어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가정과 자식들까지도 내팽개치는 것이 현실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것이
더럽혀지고 도덕이 무너진 다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몸의 때는 물로 씻을 수 있을지언정 양심의 더러운 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차가운 감방 안에 누워 제비족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코 그 시절이 화려했다고 생각진
않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혹은 당신의 주변은 모두 안녕 하신 지....

여덟째 이야기: 일본에서 생긴일

K씨에게 있어서 이번은 세 번째의 일본행이었다. 부산에 본부를 둔 무역회사 입사 후 줄곧 국내부의 영업관리 일만 맡아 오다가 해외판촉부의 직원
하나가 사표를 내면서 그리로 자리를 옮긴 것이 벌써 몇 달 전이었다. 새로 옮긴 부서는 부서의 특성상 유독 해외 출장이 많았지만 K씨는 그 일이
여간 즐겁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부서의 직원 다섯명이 함께 동경의 모 회사와 제품 수출계약을 맺기 위해 부산에서 비행기로 날아왔던 이번 출장도
K씨의 주도적 활동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래서인지 짠돌이로 소문난 부장이 모처럼 술을 사는 바람에 3차까지 동경의 뒷골목을
누비던 일행은 자정이 되어서야 숙소인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품 홍보도우미 역할 차 따라온 여직원 셋이 일찌감치 방으로 올라간 뒤에도
K씨는 부장과 함께 호텔 빠에서 두시까지 술잔을 기울인 뒤에라야 자신의 객실로 올라왔다. 워낙에 술꾼이기도 한 그였지만 오늘의 계약이 생각할수록
흡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4차까지 술을 퍼지게 마셨으니 어지간히 취할 법도 한데 K씨의 뇌리 속엔 갑자기
딴 생각이 떠올라 좀처럼 잠을 이루질 못했다. 첫째는 술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고 둘째는 술만 먹으면 이상하리 만치 여자 생각이 간절해지는 K씨의
여성 편력이 화근이었다. 잠을 청하려 별의별 노력을 다 기울이던 그는 마침내 결심을 한 듯 전화기를 들고 벨 데스크로 전화를 걸어 벨맨을 오게
했다.
"이거... 혼자 자려니까 영 잠이 오지 않아서 말이야. 얼마면 되겠나?"
일본의 일부 호텔에선 늘씬한 콜걸들이 있더라는 얘기는 언제인가 잡지의 한켠에서 읽은 터였다. K씨는 태연하게 능숙한 일본어로 물었으나 술기운으로
인해 이미 혀는 꼬부라지고 있었다.
"아, 그러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스물 두어 살쯤 되었을까. 검정 나비 넥타이를 산뜻하게 걸친 보이는 먼저 허리를 굽혀 감사의 표시부터 했다. 그리고는 의미 있는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K씨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그전에 손님께서 돈을 내고 하실건지 돈을 받고 하실건지 결정을 해 주셔야지요?"
보이의 말에 의아해진 K씨가 물었다.
"아니 이봐! 내가 여자를 부르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거늘 오히려 돈을 받고 할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럼요. 손님은 단지 선택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가씨가 틀린가. 아니면 서비스가...."
"아니요. 다 똑같습니다. 전혀 다를 것이 없읍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너무 촌스럽게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였을까. K씨가 거기서 더 이상 묻지 않은 것이 결정적 화근이었다.
"뭐가 그리 복잡해. 아무렇게나 불러 주면 되지. 이왕이면 내 돈을 받고 하겠네."
"아이고 이런... 고맙습니다 사장님."
K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보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보이는
서비스라며 맥주 두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지갑을 열어 이만엔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K씨에게 내밀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제도도 다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그는 그 중의 반을 도리어 보이에게 팁으로 찔러 주고 침대 위로 벌렁 나자빠졌다. 술이 오르는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두개
세개로 왔다 갔다 했지만 분명 꿈은 아니었다. 손님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고 오히려 돈까지 주다니... 참으로 아리송한 일이었지만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회사를 대표한 수출 계약도 무사히 마쳤고 어쩐지 자신에게는 행운이 따라 다니는 느낌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K씨가 두대 째의 담배를 태웠을 무렵 정말로 잡지책에서만 보았을 법한 절세의 아가씨 하나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채 스무 살도 넘지
않았을 법한 애띤 얼굴에 조각처럼 빚어진 몸매. 허리까지 길게 넘실거리는 생머리의 향취에 K씨는 금방 숨이 막힐 듯했다.
'제길.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게로구나..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 다오. 현실이라면 아... 이대로 죽어도 좋다....'
K씨는 다리를 꼬집어보았지만 어디까지나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순간 씽긋 웃어 보이던 그녀가 침대로 다가와 K씨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자... 그러면 우리 화끈하게 한번 시작해 볼까요?"
"아.... ...."
K씨는 숨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입고 있던 빨간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곧이어 터질 듯한 안의
내용물이 어렴풋이 K씨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흥분이 극에 달한 K씨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스탠드의 조명을 붉은 색으로 바꾸고 그녀의 몸 위로
몸을 날렸다. 그때 갑자기 밑에 깔렸던 그녀가 나즉이 속삭였다.
"저.. 우리 화끈하게 불을 켜 놓고 하면 안될까요. 전 어두우면 무서워서 흥분이 잘 안되거든요."
"그래, 그거 좋지...."
K씨가 환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일어나 방안의 조명을 환하게 밝히고는 다시금 침대로 파고들었다.
자. 그 다음에 그날 그 방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독자 여러분들 각자의 상상과 소중한 경험(?)에 맡기겠다. 혹은 더러는 일단의 잠 못
이루는 어린이들이 글을 읽고 행여나 못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글쓴이의 그 방면의 무지(?) 때문이라고 그렇게 치부해
버리기로 하자. 글의 전개상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밤, K씨는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황홀한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언젠가 보았던 일본식 포르노의 그 행위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그 묘령의 여인은 정렬적이었다. 대강 그렇다고 해두고
그 밤의 이야기는 접어 두기로 하자.
그 후, 그들은 모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고 모두 직장에 복귀하여 예전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K씨가 동료들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은 그로부터 약 삼사일 후의 일이었다. 주로 여직원들에게서부터 이상한 수군거림이 시작되더니 순식간에 온 회사 안으로 번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무슨 말인가를 하다가도 K씨만 나타나면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가 그가 사라진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렇다고 내놓고 이유를 물어 볼 것도 못 돼 고개를 기우뚱거리던 그에게 며칠 전 일본 출장을 같이 갔던 부장이 퇴근 무렵 그를 지하 커피숍으로
불러내었다.
"아니, 이봐! 자네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했어?"
"실수.... 라니요?"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 되었음을 느낀 K씨는 부장의 얼굴만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 사람. 그럼 여태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 ..."
"그날 자네 혹시 호텔에서 아가씨를 부르지 않았나?"
"예... 그.. 그게 뭐가 잘못 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예이... 이 사람아... 잘못돼도 크게 잘못 되었지. 혹시 보이에게 돈을 받지는 않았나?"
"예... 조금..."
"이런..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모르고..."
"아-니-그-럼"
"그래, 그건 일종의 출연비야. 포르노 출연비. 그 호텔 방에는 특수카메라가 설치돼 있어서 손님이 아가씨를 부를 때 돈을 내면 그냥 아가씨를
불러 주지만 돈을 받겠다고 하면 여자를 들여보낸 후 그 정사장면을 즉석에서 찍어서 전 호텔 방으로 생중계를 해 주는 곳이지. 나야 피곤해서 그냥
잠을 자느라 몰랐지만 여직원들이 우연히 그걸 보고 말았나 보네. 아침까지 녹화를 해서 틀어 주었다고 하더군. 젠장 그러기에 몸조심했어야지."

아홉째 이야기: 택시 기사 L씨의 이중생활

구름 낀 하늘. 그러나 눈은 오지 않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다. 기사 식당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간단히 비우고 나와 자신의
영업용 승용차에 앉아서 담배를 뻐끔거리던 L씨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저만치 신호등 앞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거리 신호등을 조금
못 미친 곳에는 아까부터 언뜻 보기에도 귀티가 줄줄 흘러 보이는 귀부인 차림의 여자 하나가 택시를 세우려는지 연신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택시가 앞에 와서 서기만 하면 택시 기사의 얼굴을 한번 힐끗 훔쳐보고는 그냥 보내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십여 대의 택시가 무료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쳤다.
'젠장, 공동묘지에라도 갈 참인가?'
꽁초까지 다 타 들어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L씨는 속는 셈치고 그녀 앞으로 슬그머니 차를 몰았다. 아까부터 줄곧 그녀를 지켜 본지라
잔뜩 호기심이 동하기도 한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가 그녀 앞으로 다가서자 그는 또다시 손을 흔들어 차를 세우는 시늉을 했다. 넉넉잡아
여인의 얼굴은 마흔 살쯤 되었을까. 갈색으로 연하게 물들인 머리칼은 두어 번 주리를 틀어서 핀으로 정갈하게 올려 묶었고 긴 검정색 주름치마 위에
걸친 잿빛 밍크코트는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산들거렸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사뿐히 나비처럼 부인 앞에 차를 멈춘 L씨는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를 싹 감추고 정중하게 물었다. 며칠 전 동료 기사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던지라
L씨의 입가엔 잔잔한 희심의 미소까지 떠올랐다. 그냥 돌아갈 참이었다는 듯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서 있던 그녀의 눈길이 서서히 L씨의 희색
소나타 택시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한 묘한 갈등의 표정이 스치고 있었다.
"워커힐 호텔 쪽으로 갑시다."
결정을 내렸다는 듯 쓰고 있던 검정 선글라스를 척 접어든 여인이 택시 앞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썩 만족스런 표정의 아니었으나 날씨가 차츰
쌀쌀해질 판이었는지라 더 이상 길거리에서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인 듯 했다. 나이답지 않은 하얀 피부에 곱상해 보이는 얼굴, 오똑한 콧날
밑에 까만 점 하나.자주 빛 립스틱으로 둘러싸인 도톰한 입술. 찬찬히 그녀를 흩어보던 L씨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교차로를 지나
동작대교를 건넌 후 차를 강변대로 쪽으로 우회전했다. 강변 대로를 타고 시원하게 워커힐 방향으로 갈 심산이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를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L씨는 끈기있게 기다렸다. 아직은 작전의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남 대교 부근을 지날 즈음
차가 심하게 정체되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나 부인은 애초에 시간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했다. 그냥 무료하게 창 밖을 힐끔거리며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젠장, 건수 하나 기대하다가 차만 밀리고 합승도 못하고 오늘 하루도 또 죽치는 신세군.'
갑자기 부화가 치민 L씨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때마침 잔뜩 찌푸린 마른 하늘 위에서 솜털 같은 눈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나도 담배 하나 주시구려..."
벙어리 인줄만 알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눈을 보기 위해서인지 잠시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눈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담배요. 아 얼마든지 피세요."
'그러면 그렇지. 일단 말이 붙었으니 이제 술술 풀리기는 시간 문제겠지.'
L씨는 담배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며 라이터로 불까지 깍듯하게 붙여 주었다.
"무슨 괴로운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저씬! 괴로우면 다 담배 피웁니까?"
"앗, 이거 아저씨라고 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서른 두 살, 한창 팔팔한 총각이랍니다."
결혼 2년째인 L씨는 짐짓 거짓말을 했다. 아무렴 아저씨보다야 총각이 났지 않을까 해서였다. 요즘 돈 많은 유한 마담들이 어디 아저씨 찾는 것
보았는가. 담배를 빨던 그녀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봐요? 댁이 총각인지 아저씬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보기를 했어요? 아니면 무엇으로 증명을 한답니까? 요즘은 고등학생만 되어도 총각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랍니다. 하물며 서른 두살씩이나 먹어놓고는..."
"아, 손님도... 그렇게 따지면야 할 말이 없읍죠."
이야기가 어찌 음담패설로 심상찮게 흐른다.
'오늘 잘하면 봉을 건지겠구나.'
솟아오르는 기쁨을 꾹꾹 눌러 참으며 L씨는 어서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차는 어느덧 잠실 대교 부근을 지나 워커힐 사거리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저씨 그러지말고 오늘 날도 그렇고 기분도 싱숭생숭 한데 나랑 드라이브나 더 합시다. 내 합승 요금까지 생각해서 삯은 후하게 쳐
드릴테니..."
"요금을 주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어디로 모시면 좋을까요?"
"예까지 왔는데 다시 시내로 굳이 돌아갈 일 있나요? 저기서 우회전 해서 그냥 양수리 쪽으로 쭈욱 내 달립시다."
그녀는 주저없이 차들이 미등을 깜박거리며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 사거리를 가리켰다. 말을 하는 폼이 전에도 어느 놈팽이랑 수없이도 와 본 길인
듯했다.
"양수리라면 양평 가는 길 아닙니까? 거기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아닌가요?"
"그래요, 그쪽으로 쭈욱 빠졌다가 분위기 있는 곳에서 커피나 한잔하고 돌아오지요..."
눈은 점점 그쳐 가고 있었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언제나 차량으로 붐비는 곳이 워커힐 고갯길이다. 스키 캐리어를 장착한 차량들과 그만 그만한
남녀들로 쌍쌍이 히히덕 거리는 차들이 대부분 이었다. 모두들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L씨는 창문을 조금 열고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부인은
이번에는 담배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작은 핸드백 가방을 열고 콤팩트와 립스틱을 꺼내어 막 화장을 고치는 중이었다. L씨는 카세트
테이프에 '조용필 골든'이라고 써진 낡은 테이프를 밀어 넣고 볼륨을 올렸다. 이쯤 나이의 대부분의 여자들 치고 조용필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
마침 흘러나온 노래가 '그 겨울의 찻집'이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L씨는 흡족한 듯 내심 쾌재를 불렀다.
"노래하면 역시 조용필이 최고지요."
L씨는 슬쩍 부인을 돌아보며 운장을 땠다. 기분만 잘 맞춰 주면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열을 올리는 것이 그 나이의 배부른 중년 부인네들의 공통된
특성이 아니었던가.
"어머, 조용필을 좋아하세요. 이 아저씨 뭔가를 아시는 분이네. 아휴 요즘 나오는 노래는 영 노랜지 춤인지 구분이 안가요. 십여 명씩 우르르
물려 나와서는 가사만 틀릴 뿐인 똑같은 노래에 비슷한 춤으로 철모르는 학생들만 유혹을 하니... 또 거기에다가 그것을 앞 다투어 방송하는
방송사의 어른들이나.. 몰지각 하기는 다 마찬가지에요. 요즘은 가요대상을 받은 노래도 다음해 지나면 잊혀져 버려요. 그게 무슨 노랩니까. 몇년,
몇십년이 지나도 꾸준히 불리는 노래가 노래지요. 요즘은 노래에 혼들이 없어요."
"맞습니다. 노래하면 실력으로 보나 노래로 보나 당연 옛날 가수들이 더 낫지요."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열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L씨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투가 영 못 배워먹은 여자는 아니었다.
차는 시내를 빠져 나오자 한적해진 길을 속력을 내며 내달렸다. 구리를 벗어나면서부터 차량들이 좀 뜸해졌다. 몇곳의 공사 구간을 지나자 청평호를
낀 이차선 도로가 주욱 펼쳐져 있었다. 이제 곧장 내달리면 양수리에 닿는다. 양수리에 닿아서 이 여인은 또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물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호반 길을 삼십분여 내달리자 양수리에 닿았고 어느덧 시간은 하오로 치닫고 있었다. 검문소 삼거리에서 차는 양수대교를 건너지 않고
춘천 가는 길로 좌회전을 했다. 양수대교를 건너자마자 철길을 건너 좌회전을 해도 되었지만 강 건너보다는 아무래도 강 이쪽이 개발이 더 된
까닭이었다. 양수리. 남한강과 북한강, 두개의 강줄기가 합쳐져 하나로 된다는 뜻에서 양수리란 지명이 붙은 곳이었으나 늘어나는 러브호텔과 까페들로
오히려 불륜의 장소로도 더 많이 이용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곳이기도 했다. 강 언덕에 궁전처럼 지어진 몇개의 러브호텔과 음식점들을 스쳐 지나
얼마쯤을 달릴 무렵, 한곳을 가리킨 부인이 차를 세우자고 했다. 그곳은 '파라다이스'란 간판이 걸린 중세 유럽의 성 모양을 본딴 마치 궁전을
방불케 하는 호텔이었다.
'젠장, 파라다이스라니.. 파라다이스란 천국이 아니던가. 착한 짓을 해야만 갈 수 있다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데 대낮 불륜족이
대부분인 이런 곳의 이름이 파라다이스라니... 어차피 죽어서 지옥에 갈 몸들, 살아서라도 낙원을 즐겨보잔 이야기인가. 그 추한 몸들을
지느러미처럼 흔들어 가면서... 그래, 어디 갈 때까지 가 보자...'
심호흡을 한 번 길게 내뱉은 L씨는 각오한 듯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차를 몰았다. 차가 주차장에 깔아 놓은 자갈에 부딪히는지 바퀴에서 자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에서 내리자 갑자기 부인이 곁으로 다가오며 능숙한 폼으로 팔짱을 꼈다.
"차들이 많군요. 아직은 대낮인데..."
멋적어진 L씨가 한마디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주차장에는 벌써 이십여대의 차들이 저마다 번호판을 가린채 얌전히도 주인들이 일을 끝 마치고
나올때를 주욱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꾸 대신 부인은 L씨를 호텔 일층에 마련된 까페로 이끌었다. 카페 안은 어두웠다. 일부러 아는 사람을
피하게 하기 위해 조명이 어둡다는 사실을 L씨가 안 것은 좀 더 이 생활에 프로가 된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름모를 피아노 반주가 흐르고 있던
실내는 훈훈했다. 저만치 벽난로가 타고 있는 구석 자리 옆으로 자리를 잡은 부인은 웨이터가 다가오자 L씨에겐 묻지도 않고 양주 한병과 안주를
시켰다.
"탁 까놓고 얘기합시다. 기사 양반..."
"뭘... 말입니까?"
대자 패스포트 한병이 반 이상 비워진 후였다. 별 말없이 술잔을 비우던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지요? 이런 경험 처음이세요?"
"처음입니다만..."
대강의 짐작을 했지만 L씨는 짐짓 의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마 주면 되겠어요?"
"알아서 하세요. 주는 데로 받아야지요."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수표 한장을 꺼내어 L씨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오십만원짜리 수표 한장이었다.
"아니...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의외로 액수가 많았던지라 L씨는 돈을 받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오십만원이면 입금 빼고도 일주일은 부지런히 뛰어야 벌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받아 넣어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택시비가 아닌 가요. 택시비를 조금 더 얹어 주었을 뿐인데 뭐가 잘못될 것이
있답니까?"
그녀는 까르르 소리를 내어 웃기까지 했다. L씨는 잠시 자신이 화대를 받는 창녀가 된 느낌으로 앉아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썩어빠진 세상인데.. L씨는 연거푸 남은 술잔을 비워 냈다.
"호호...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요."
갑자기 부인의 말이 많아졌다.
"후...내가 오늘따라 얼마나 고생을 한지 알아요. 아. 내가 돈이 없어 차가 없어 택시를 잡겠어요. 다 이유가 있어 서지요. 그런데 오늘
일진이 영 아니라 걱정했어요. 오늘따라 미남 택시 기사 양반들은 다 어디로 가고 늙은 쭈그렁탱이들만 지나가는지 얼마나 고생을 했다구요. 그냥
집으로 들어가서 찜질방이나 갈까 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후후.. 우리의 젊은 오빠가 나타난거지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들을 내뱉는 것을 보니 이미 그녀는 이런 식의 남자 사냥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그녀의 익숙한 말솜씨와
행동은 이미 여럿 그런 친구들이 있는 듯했다. 까페를 나오자 시간은 저녁 다섯시를 넘기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검정 가운을 입은 종업원 하나가
다가와 둘을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했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자 문이 열리며 흡족한 표정의 남녀 한 쌍이 팔짱을 낀 채 나오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파라다이스를 본 얼굴들이다.
"제일 높은 층으로 주세요"
올라가면서 그녀는 한마디했을 뿐이다. 07호실이라고 써진 방 앞에서 따라온 종업원에게 방값을 지불한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L씨의
몸으로 달라붙었다. 술기운이기도 했지만 몹시도 남자에게 굶주린 모양이었다.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저만치 북한강의 강물이 넘실거리며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방안에는 계속해서 끈적거리는 유혹이 흐를 뿐이다. 부인은 어쩌면 그렇게 제 남편에게도 해주지 않았을 법한 온갖 몸짓들을 L씨에게
해대었다. 더는 견디지 못한 L씨는 황급히 옷을 벗어 던지고 부인의 일에 동참했다. 적어도 택시비 이외로 받은 팁 값은 해야 되겠다는 투철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텔 파라다이스는 후끈한 남녀들로 인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아무도 서로에 대하여 묻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얼마간의 돈이나 몸의 대화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후세 그들의 풍광 좋은 정사를 위하여 북한강은 옛부터 그 자리에서
그렇게 흐르고 있었던 것인지... ...
"저 혹시 연락처라도..."
처음에 그녀를 태웠던 방배동의 고급 빌라 단지 부근에 이르러 차를 세울 무렵, L씨는 차에서 내리려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시간을 보니 저녁
아홉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호텔방에 들어간지 세시간 남짓 얼마나 시달렸던지 L씨는 다리가 후들거려 어떻게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운전을 여기까지 해 왔는지 정신이 몽롱했다. 과연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한창 왕성한 중년 여성답게 끝없이 L씨를 괴롭히며 확실하게 본전을
뽑는 눈치였다.
"아저씬 매너 없이 왜 그래요?"
차에서 내린 그녀가 탁 쏘아 붙였다.
"저도 실례인 건 압니다만 워낙 부인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궁합도 잘 맞았고..."
저만치 두어걸음 옮기던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궁합이 어쨌다구요. 나참.. 솔직히 말해 줄까요. 지금 내 기분이 어쩐지. 솔직히 본전 생각이 간절한걸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금방 나가 떨어져서 어디... 쯧쯧..."
그녀는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즐길 때는 즐기고 확실하게 맺고 끊을 줄 아는 과연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그래야
지질한 후환도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철저한 이중 생활의 모범을 가르쳐 준 부인이 사라진 언덕길을 바라보며 공허하게 담배를 태워 물었던 L씨는
겨우 몸을 추스리며 차에 올랐다. L씨의 뇌리 속은 한 몇 시간 푹 자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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