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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도사 성인 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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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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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당당해 보이는 핫팬츠 역시 스타킹으로
감싸지 않은 맨다리였다. 이상하게 요즘은 스타킹으로 감싼 다리를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할 때쯤, 장기하 앞으로 계속해서 많은 사
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아시스 2
여름은 아무래도 젊은 여성들의 계절인가 보다. 젊은 여자라고
더위에 힘들어 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얼굴은 밝아
보였다. 지금 앞에서 지나가는 인파들 중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들 중에서도 나이가 든 여자
들은 힘들어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지금 앞을 지나가고
있는 여성은 승복(僧服) 같은 색깔과 질감의 단정한 투피스이고 스
타킹으로 감싼 다리도 하고 있지만, 표정은 힘들어 보인다. 나이가
줄잡자 마흔 중반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그녀의 나이만큼의 무게
처럼 무거운 걸음걸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단정한 맛은 풍기지만
그녀는 여성이지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몇 명의 여고생들은 그들 나
이만큼의 가벼운 무게로 뜨거운 태양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걸
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일행 중에서 장기하의 시
선을 끌 정도로 돋보였는데, 여고생 답지 않는 키와 성숙한 몸매였
다. 그녀는 반소매의 감색 오버 블라우스(블라우스를 하의 위로 내
어 입는 형태의 블라우스)와 회색 스커트로 이루어진 투피스 스타
일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플랫 칼라(세우는 깃이 없이 앞뒤 모두
가 평탄한 칼라) 끝과 반소매 솔기선 위에는 흰색의 가는 라인이
둘러져 있고 단추도 흰색인 디자인이었다. 그 흰색 라인과 단추는
불라우스의 짙은 감색 원단으로 인하여 더욱 하얗게 보였다. 스커
트는 약간은 풍성한 스타일의 무릎 길이 정도였는데, 그 아래로 맨
다리에 흰색 양말과 검정색 단화를 볼 수가 있었다. 소녀의 교복은
전체적으로 풍성함과 타이트함이 잘 어울려져 드레시하면서도 유
연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고, 소녀의 소녀답지 않은 성숙한 몸
매가 그것을 교복이 아니라 마치 젊은 여성의 유니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런 소녀가 퍼머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 성싶은 검
고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를 휘날리면서 장기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상큼한 묘한 매력이 풍겼다.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진지 별로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자세한 모습은 장기하의 기억에 흐릿해졌
다. 다만 그녀의 상큼함과 독특했던 매력이 아마도 정은주의 여고
시절의 모습이 혹시나 저러했으리라, 라는 생각으로 장기하에게 남
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유니폼 같은 교복의 감색 블라우스와
그 블라우스를 돋보이게 했던 옷깃과 소매의 흰색 라인으로 그녀
의 이미지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 소녀의 이미지는 소녀의 감색 블
라우스가 사내 여직원의 베스트와 스커트로, 감색으로 더 하얗게
보였던 옷깃과 반소매 끝의 흰색 라인은 여직원의 흰색 블라우스
로 장기하의 뇌리 속에서 변해 갔다. 그 감색 베스트와 스커트, 흰
색 블라우스로 이루어진 유니폼을 이 시간, 사내에서 정은주는 입
고 있을 것이다.
아! 정은주…….
담배 한 대로 잠시 가슴 한편에 묻어 두었던 정은주가 다시 떠
오르기 시작했다. 담배 한 대에 잠시 잊을 수 있었던 답답함이 다
시 번지기 시작했다.
장기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이 답답함이 사라질까, 이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눈을 감고 잊으려고 애를 쓸수록
정은주의 모습은 더욱 뚜렷해져만 간다. 정은주의 모습이 뚜렷해질
수록 고통은 강도를 더해만 간다.
이때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도심이지
만 빌딩숲 사이에서 불어오는 도심의 산들바람은 시골의 산들바람
만큼의 청량감은 없어도 한 여름철 도심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빌딩숲 산들바람에 장기하는 서서히 상쾌해져 갔다. 상쾌해지는 마
음에 조금씩 정은주가 사라져 간다, 답답함이 수그러들기 시작한
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핫팬츠를 데리고 와 이 소녀의 감색
오버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겨 입히고, 하얀 원피스로 지나갔던
여성의 발에서 하얀 샌들과 투피스의 중년 여자의 다리를 감쌌던
스타킹을 벗겨서 신기면, 핫팬츠는 정은주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다! 조금 전의 중년 여자의 스타킹은 여자의 색이 아닌 살색이었으
니까, 스타킹은 커피색을 어디에라도 가서 사 와야겠지. 그렇게 하
면 완벽한 정은주가 될 수 있을까? 또 아니다. 소녀의 교복 블라우
스와 정은주의 유니폼 블라우스가 다르다. 색상과 형태가 달랐다.
스커트는 형태는 비슷했으나 색상이 달랐다. 이건 넘어가자. 그냥
사내 여직원들의 하절기용 새로운 유니폼이라고 하자. 그럼 새로운
유니폼을 입은 정은주가 될까? 아니다. 정은주는 핫팬츠와 키는 비
슷하지만 글래머는 아니다. 작지 않은 키와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
힌 몸매라는 점은 비슷할지 모르나 핫팬츠처럼 천박한 매력은 아
니다. 육감적이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몸매는 정은주만의 매력
이다. 그래, 몸매가 변했다고 하자! 사람이 나이에 따라 얼굴이 변
하듯이 몸매도 변했다고 하자. 얼굴은? 얼굴도 변했다! 변했다고
하자. 정은주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성형수술을 받은 거다. 이제
핫팬츠는 새로운 모습의 정은주가 된 것일까? 그런 새로운 정은주
는 이젠 나에게 좀 살갑게 대하지는 않을까? 나에게 마음을 열어
내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래서 우리는 가까
워질 수 있지 않을까?
기하 씨, 실은 기하 씨를 오래 전부터 지켜봤어요. 그리고, 그리
고…… 이젠 기하 씨에게 말하고 싶어요. 내 마음을 받아 달라고
말예요.
그래, 그래서 내 심장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지만 조심스럽
게, 정중하게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난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징조로 그녀를 안을 꺼야. 내 품으로 살포시 안겨 오는 그녀, 정은
주. 비록 얼굴과 몸매는 변한 새로운 모습의 정은주지만 그래도 그
녀는 정은주야. 그리고 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넬 꺼야, 아주 조심
스럽게……. 은주 씨, 내 열정을 알아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군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그런데…… 그런데 뭐죠? 말해 보세요. 이제 우리는 아무런 거리
낌도 없는 사이가 아닌 가요? 말해 보세요, 어서……. 편하게 말해
보세요.
난, 더욱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아무리 편하게 말해
보라고 하는 그녀지만 자칫 잘못하여 그녀의 자존심에 아주 조그
만 상처라도 입히면, 아직은 견고하지 못하여 살얼음 같은 우리 관
계가 깨질지도 몰라. 아직 난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못했잖아. 저기, 저기…… 절대 무얼 따지려는 것은 아니고요, 단
지…… 단지…….
아! 갑갑해요, 기하 씨. 미스 박 언니의 충고 기억나지 않으세요?
편하게, 솔직하게 말하세요.
새로운 모습의 정은주는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그녀 말대로 솔직하게 말하자, 물어보자.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은주
씨와 오 전무님의 관계는…… 그런 사이 아니죠?
그런데,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왜 그녀의 얼굴은 성을 내
는 걸까? 말은 없지만 분명 지금 내 가슴을 강하게 밀치고 나간
그녀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성을 내는 얼굴인
데…… 왜? 왜? 갑갑하다.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져 가면서
외친다.
내가 정은주로 보이니? 그래, 니 원대로 몸은 새로운 모습의 정
은주가 되었지만 내 영혼은……. 내 영혼도 정은주로 보이니? 난
핫팬츠야, 뜨거운 핫팬츠. 하도 니가 안돼 보여서 오늘 정은주의
모습으로 널 사랑해 주려고 했는데, 니가 망쳤어. 제길, 착각하지
마. 넌 정은주를 사랑하는 게 아냐. 넌 정은주의 얼굴과 몸을 사랑
하는 거야. 넌 정은주의 육체를 감싸고 있는 그 여자의 블라우스와
스커트와 커피색 스타킹 같은 그녀의 허상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매력적인 섹스 상대로 말이야. 니가 정말로 정은주를 사랑
한다면 오 전무와의 관계가 왜 문제지? 정은주가 설사 오 전무와
깊은 관계이던, 미스 박의 오해이던 간에 무슨 소용이지? 넌 정은
주를 사랑하는 게 아냐!
가지마! 안돼……! 넌 정은주야. 그래, 니가 오 전무와 무슨 관계
이던지 간에 상관 안할게. 아니 상관없어. 제발 내 곁에만 있어 주
면 돼. 영혼? 그래, 좀 전에 내가 커피색 스타킹을 사 왔듯이 은주,
니 영혼도 사 올께. 기다려! 조금만 기다려…… 제발!
꿈이었다. 도심의 산들바람이 장기하를 꿈꾸게 했었나 보다. 이
젠 장기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무게로 가슴 깊게 자리 잡은 정
은주에 대한 열정이 거리의 벤치에도 꿈을 꾸게 한 것인가 보다.
장기하의 꿈은, 그날 이후 장기하를 괴롭히고 있는 김 대리가 미스
박의 목격담이라면서 전해준 실체 모를 정은주와 오 전무와의 관
계가 기폭제가 되었으리라.
갑자기 이해 못할 분노에 흽싸인 장기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한다. 벌써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를 지나고 있었다. 아직은 부장에게 전화하기는 이른 시간이다. 최
소한 일곱 시는 넘어야 한다. 물론 자취방으로 가 있다가 적당한
시간에 핸드폰으로 대리점을 들르고 있다고 하고 업무 후 바로 퇴
근하겠다고 하면 되지만, 가끔은 회사로 들어오라는 때가 있어서
그것도 좀 그랬다. 자취를 하고 있는 집과 회사의 거리가 매우 멀
었기 때문이다. 월세가 싼 곳을 찾다보니 시내 변두리의 방을 얻었
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대형서점이 있어 장기하는 그곳으로 향했다. 거기
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면서, 읽으면서 시간을 때웠다.
한동안 책에 몰두하던 장기하는 핸드폰 벨소리에 정신을 차렸
다. 부장이었다. 첫마디부터 말을 더듬었다. 이건 부장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이다. 부장의 습관이었다.
젠장, 그놈의 대리점이 끝내 말썽인가 보다. 결제도 차일피일 미
루더니, 오늘은 얼마 전에 납품한 제품에 문제가 있어 클레임을 걸
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담당자는 분명 장기하 자신인데 이
런 연락을 내게 아닌 부장에게 직접 한 걸로 보아 뭔가 꿍꿍이 속
이 있는 듯했다. 방법이 없었다. 당장 그놈의 골칫덩이 대리점으로
가보는 수밖엔…….
장기하는 대리점에 도착했다.
이번 오더는 평소보다 많은 양이었다. 일부는 회사에 재고가 없
어서 거래처인 제조업체에 급하게 오더를 넣어서 겨우 납기일을
맞출 수 있을 정도의 물량이었다. 그런데 대리점 사장이 일부가 주
문한 것과 틀리다고 한다. 어디서 착오가 생겼는지, 아니면 이놈의
사장이 생떼를 쓰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장기하의 회사는 가전·가정용품을 중소 제조업체에서 납품 받
아 시장에 공급하는 유통회사다. 여러 대리점들은 그 시장 중 하나
이다. 대기업에도 납품을 하긴 하지만, 장기하의 회사 제품만 직영
으로 취급하는 직영점은 아직 없어서 이런 개인 대리점들은 회사
입장에선 중요한 고객이다. 그 중에서도 이 대리점은 큰 편에 속한
다.
말이 계속해서 길어진다. 벌써 한 시간이 넘게 결론이 없는 실
랑이만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오더 원장을 보아야지
어디서, 누구의 착오인지 명백해질 것 같다. 원장은 사무실에 있다.
아무래도 회사엘 들어가 봐야겠다. 지난 번에 공급한 물품의 대금
결제에 대한 말은 꺼내 보지도 못한 채, 확인 후 바로 조치를 취해
드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대리점을 나오려는데 이놈의 대리점 사장
이 뒤에서 시부렁거리기 시작했다. 당신네 영업부장과의 인간관계
를 봐서 그 동안 불합리한 조건에서도 거래를 끊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등……. 저놈의 대리점 사장이 부장을 거론하
는 것은 자신은 오 전무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말하
는 것이다. 오 전무와 대리점 사장은 동향(同鄕)으로 장기하는 알
고 있었다. 지금 장기하 뒤에다 대고 계속해서 시부렁거리고 있는
이놈의 대리점 사장은 이쪽 분야의 판매 사업을 시작한 것도 오
전무의 권유에서였고, 부장은 오 전무 사람이다. 아무튼 오늘 오
전무는 여러 가지로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는군, 장기하는 그렇게
느껴졌다.
회사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장기하는 핸드폰의 백라이
트를 켜야만 했다. 손목시계가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요새 며칠 동
안 장기하의 책상 서랍에서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여
덟 시. 이때쯤이면 장기하의 회사가 5층과 6층에 임대해 있는 이 7
층 짜리 크지 않은 빌딩엔, 가끔 야근을 하는지 늦게까지 불을 밝
히는 2층과 4층의 사무실과 경비 한 명만을 남기고는 비어 있을
시각이다. 혼자서 야근을 자주 해봤던 장기하는 이 빌딩의 저녁 상
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다. 모레가 신임 사장
취임식 날이니 아직 회사에 사람들이 남아 있을 지도 말이다. 그러
나 오늘은 빌딩의 모든 층의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정문에 셔터가 내려져 있지? 아직은 셔
터를 내릴 시간은 아닌데. 아 참, 그랬었지.
얼마 전에 경비 야간조였던 최 씨가 그만두었었다. 한동안은 주
간조였던 유 씨가 이 빌딩의 셔터를 내리는 자정 한 시간 전까지
연장 근무를 했었지만, 고단하다는 이유로 제 근무 시간에서 한두
시간만을 현관 경비실에서 대충 때우다가 도망가기 시작한 며칠
전부터 야간은 이 빌딩의 공백 상태였다. 만일 후문의 비상키를 가
지고 있지 않았다면 장기하는 헛걸음을 했을 것이다. 후문 비상키
는 최 씨가 이 빌딩의 경비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장기하에게 말하
던 날, 혹시나 해서 복제를 해 두었었다. 그날 열쇠 복제를 잘 해
두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철문으로 된 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선 장기하는 정문 쪽의 경비실로 향했다. 열쇠 보관함의 자물쇠는
잠겨 있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5'와 '6'이 스티커에 쓰여진 열쇠
꾸러미를 찾을 수가 있었다. 다행이었지만 장기하는, 최 씨가 그만
둔 이후로 이 빌딩의 관리는 엉망이다. 유 씨는 성실하지가 않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아시스 2
어두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바로 향한 장
기하는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빌딩의 엘리베이터 속도는, 빨
리 오더 원장을 확인하고픈 마음의 장기하를 태우고 올라가기엔
느리다. 5층 정도면 차라리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더 빨랐다. 그리
고 장기하의 마음도 급했기 때문이었다.
5층에 도착한 장기하는 숨은 거칠고 온 몸도 땀으로 흠뻑 젖어
서 담배 한 개피로 한숨을 돌리고 싶었지만, 바로 영업부 사무실의
잠긴 도어를 열고 불부터 켰다. 바로 자기 자리로 향한 장기하는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원장철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더 원장에는
이상이 없었다. 어디에서 착오가 생긴 거지? 젠장, 관리부로 가서
또 서류를 뒤져야만 하나보다.
영업부 사무실을 나와 건너편의 관리부로 향했다. 문을 열고, 캄
캄한 사무실의 불을 켜고, 서류철을 뒤졌다. 젠장, 이게 뭐야? 관리
부에서 제조업체에 발주한 서류 중에서, 이번 대리점에 납품된 제
품을 공급하는 회사로 발송된 문서에 이상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
시내 대리점 담당 파트인 관리부 박 대리와 미스 현은 실수가 없
는 꼼꼼한 사람들이었다.
영업부에서 수주한 오더는 먼저 총무부로 넘겨져서 검토를 하여
결제가 나면, 최종적으로 제조업체에 발주하고 납품 받는 업무와
대리점과 대기업이나 지방의 총판 대리점에 제품을 공급하는 업무
를 담당하는 관리부로 넘겨진다.
'젠장, 그럼 총무부에까지 올라가 봐야 하나?'
그놈의 대리점 사장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집에 있을 텐데, 라는
생각에 짜증이 난 장기하는 총무부에 가보고 나갈 생각으로 영업
부와 관리부의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다시 계단을 이용해 바로
윗층의 총무부로 향했다.
5층엔 영업부와 관리부가, 6층엔 총무부와 회의실, 탕비실과 제
품들을 전시해 놓은 쇼룸, 그리고 몇 개의 중역실과 사장실이 있
다.
6층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 시야에 곧바로 '풍산
유통주식회사'이라고 회사명을 청동으로 멋있게 양각한 현판을 볼
수가 있다. 지금은 비록 엘리베이터 앞 천장의 유도등(誘導燈)때문
에 환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장기하의 눈에는 오히려 노란 불빛을
내는 유도등 전구가 청동의 광채를 더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현
판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총무부 사무실이다.
총무부의 문은 쉽게 열리지가 않았다. 몇 번 반복 끝에 겨우 문
을 열 수 있었다. 총무부 사무실에 들어선 장기하는 불을 켜자마자
담당자의 책상으로 갔다. 서류철이 없었다. 서류는 서류 보관함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장기하는 당연히 총무부 서류함의 열쇠는 갖
고 있지 않았다. 젠장,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나? 관리부의 서류에
이상이 있는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관리부의 실수인지, 총무부의 실수인지…….
내일에 가서나 정확한 원인을 알 수가 있겠다는 판단에 장기하
는 이제 그만 집으로 갈 생각으로 총무부의 불을 끄고 출입문을
잠갔다.
이 시간에 이게 무슨 짓이람. 허탈해진 장기하는 그제서야 담배
를 피워 물었다. 담배로 한숨을 돌리고 있는 장기하는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업직이기에 한 여름에도 긴소매 셔츠를 입어야
하는 장기하로서는 아까 5층까지 계단으로 뛰어 올라온 것이 건물
의 냉방이 커진 이 시간에 심한 갈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셔츠 등짝이 지금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물을 마시려 장기하는 생수통이 있는 복도 구석으로 갔지만, 생
수통의 레버를 아무리 당겨도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생수통은 비워 있었다.
'젠장, 오늘은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5층으로 내려가면 또 하나의 생수통이 있긴 하지만, 귀찮았다.
그때 탕비실이 떠올랐다. 탕비실엘 가면 정수기가 있지? 대용량의
강력한 냉각 능력을 지닌 정수기. 장기하가 취급하는 아이템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탕비실로 향했다. 그런데 젠장, 탕비실의 열쇠는 꾸러미에 없었
다. 탕비실의 열쇠는 여직원이 가지고 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든
장기하는 언젠가 쇼룸에서 거래를 희망하던 손님과 상담을 할 때
쇼룸 출입문이 아닌 벽 중앙의 문으로 차를 가져오던 미스 최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쇼룸에 탕비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던 같애. 쇼룸의 문을
연 장기하는 바로 전등 스위치부터 찾았으나 이상하게 이 방은 출
입문 쪽에 전등 스위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옥외의 희미한 불빛에 의존하여 문을 찾을 수 밖엔 없었다. 장기하
의 기억이 맞았다.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라 조금은 헤매긴
했지만 얼마 걸리지 않아 탕비실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때 비로소 이 문 옆 오른쪽 벽에 달려 있는 전등 스위치를 찾을
수가 있었던 장기하는 불을 켜고 꾸러미를 뒤져서 열쇠를 찾기 시
작했다. 하지만 이 문의 열쇠도 꾸러미엔 없었다.
젠장, 갈증 좀 가라앉히고 가려고 했는데……. 낭패감이 든 장기
하는 불을 끄고 쇼룸을 나갈 요량으로 벽의 전등 스위츠에 손을
가져갔는데, 벽의 질감에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만져 보니 나무였
다. 이 벽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재로 된 벽이었다. 문틀도 목재
였다. 간이벽이라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든 장기하는 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문틀은 견고함이 없어 보였으며 문짝 또한 약간 틀어
진 체로 닫혀 있었다. 혹시나 하고 문의 노브를 돌려보았다. 돌려
지지는 않았으나 문짝 전체의 유격이 심하게 느껴졌다. 잘하면 문
이 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어록 노브를 꽉 손에 쥐고 힘껏 틀
어 보았다. 문짝 전체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문은 열
리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장기하는 다시 도어록을 손에
쥐고 문짝 자체를 들어서 힘껏 비틀어 보았다.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도어록은 돌아가진 않았으나 문짝 자체가
문틀에서 비틀어져서 안쪽으로 밀려 열린 것이다. 장기하는 심한
갈증만 삭이고 탕비실의 출입문으로 바로 나갈 요량으로 열린 문
으로 들어서면서 쇼룸의 불은 끄고 문의 도어록을 잠갔다.
안으로 들어자마자 장기하는 바로 정수기부터 찾았다. 그때 정
수기 컨트롤 패널의 아주 조그만 녹색 LED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정수기의 패널 부분에 손을 댄 채 오른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보니
손에 컵이 잡혔다. 장기하는 컵을 챙겨 들고 냉(冷) 레버를 눌러
컵 가득히 물을 받았다. 한 잔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장기하는 큰
컵으로 세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갈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그때서야 장기하는 주위를 둘러볼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런 내가 불도 켜질 않
았군. 너무 어두웠다. 마치 칠흑 같은 암흑만이 장기하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리 불을 끈 밤이라지만, 이 정도의 암흑이라면 여긴
창이 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 나갈 생각으로 출입문을 찾으려고 움직이는데 암흑이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었는지, 얼굴에 무언가가 거치적거리는 것을 느낄
수 뿐 쇼룸 쪽의 문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건 하나가 아닌
여러 무엇이 가벼운 무게감과 부드러운 질감의 느낌으로 얼굴에
와 닿아 스치는 걸로 봐서는 옷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어렴
풋이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다음엔…… 여긴 쇼룸이예요. 우리 회사에서 취급하는 제품들
을 디스플레이 해 놓은 일종의 쇼룸이죠. 대리점과 상담도 하고 접
대도 하는 곳이죠. 저 문은 뭐냐고요? 저 문은 탕비실과 통하는 문
이에요. 탕비실이 뭐 하는 곳이냐고요? 차를 끓이죠. 여기 쇼룸을
방문한 손님과 사장실의 손님에게 접대할 차를 끓이죠. 그리고 금
남의 장소이기도 하고요. 왜 금남의 장소냐고요? 탕비실에서 손님
의 차를 끓이기도 하지만, 여직원들의 탈의실로도 겸하고 있어요.
예? 저길 꼭 보고 싶다고요? 호호! 성함이……? 아, 김치학 씨. 치
학 씨라…… 혹시 치학 씨가 아니라 치한 씨 아닌 가요? 김치한!
여직원들에게 조심해야 할 직원 한 분 들어왔다고 알려주어야겠네
요.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데 이분은 아까부터 말씀이 없으
시네요. 성함이…… 네? 잘 안 들려요. 크게! 아, 장기하 씨. 장기하
씨는 뭐 궁금한 것 없나요? 예? 탕비실에서 차를 끓여 나가서 다
시 사장실 들어가려면 불편하겠다고요? 호호. 장기하 씨는 성격이
자상한가 봐요. 그래도 전보다는 편해진 거예요. 전엔 복도 끝의
여자 화장실에서 차를 끓이고 옷도 갈아입고 그랬었는데, 일 년 전
쯤에, 쇼룸에 수도가 들어와 있어서 그쪽을 막아 공사를 한 거예
요. 그 바람에 쇼룸은 불 켜기가 까다로워졌지만……. 사장실에 손
님이 오시면 사장님은 총무부에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시죠. 그럼
여직원이 탕비실에 들어가 차를 끓여 대기하고 있다가 사장실과
탕비실에 연결된 인터폰으로 호출을 받고 차를 내가죠. 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쇼룸 구경은 그만하시고 다들 절
따라오세요. 이사 님들께 인사를 드려야죠."
삼 년 전, 장기하가 첫 출근하던 날에 부장의 지시로 신입사원
들에게 사내를 안내하던 미스 박에게 들었던 설명이었다.
그래서 쇼룸의 스위치를 찾는데 헤맸었군. 6층……, 회사의 핵심
층. 지휘부. 오늘 자신을 고생시키는 총무부가 있는 층. 총무부엔
정은주가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사장실과 중역실이 있는 층. 그
가운데 쇼룸이 있고 지금 여기가 있고, 나아가서 왼쪽으로 향하면
회의실이 나온다. 이 층에서 작은 권력 다툼이 있었지. 사장과 오
전무와의 갈등에서 오 전무는 왜 졌을까? 오 전무……! 도대체 오
전무와 정은주는 무슨 관계란 말인가?
총무부에 업무가 있거나 누가 호출을 하기 전에는 6층엔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던 장기하로서는 6층의 구조가 새삼스럽게 다가왔
다.
미스 박에 대한 기억 중 "……손님의 차를 끓이기도 하지만 여
직원들의 탈의실로도 겸하고 있어요" 라는 말이 이상하게 뇌리에
맴돌기 시작한 장기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여직원들이
옷을 갈아입는다…… 금남의 장소? 그때 어디선가 '웅'하는 모터음
이 들려 왔다. 저 소리의 위치로 봐서는 정수기의 컴프레서 소리는
아닌 듯 싶었다. 조심스럽게 모터음이 나는 방향으로 몇 걸음을 옮
기자, 뻗은 손끝에 무언가 딱딱한 물체가 느껴졌다. 장기하는 온몸
의 신경을 손끝에 모아서 물체를 더듬어 보았다. 냉장고였다. 냉장
고를 계속해서 더듬어 냉장고 문의 손잡이를 찾았고, 열었다. 열린
문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기하는 자신이 마치 탐
정이나 된 듯한 기분에 쓴 웃음을 지었다. 냉장고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누런빛은 약했지만, 그 근처의 사물들을 분간할 수는 있었
다. 냉장고 옆, 대략 1미터 못 미쳐서 벽면에 전등 스위치가 있음
을 볼 수가 있었다. 스위치를 눌렀다. 깜박깜박, 간헐적으로 미세한
번쩍임과 소리가 들리더니 불빛이 터졌다. 순간적인 눈부심에 눈이
아파 와 눈을 감았다. 형광등에도 눈을 아파할 수가 있구나, 라는
낯선 경험이었다. 잠시 후 눈을 뜨자 망막은 서서히 빛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
들은 검은옷을 벗고 제각기 제 형태와 제 색으로 장기하에게 다가
오기 시작했다. 장기하는 그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른편에 정수기가 우측 벽에 기대어 있다. 그 정수기, 장기하의
시선으로 정수기 오른쪽 뒤로는 문이 보인다. 조금 전에 이리로 문
을 비틀어 들어왔던 쇼룸과 접한 출입문이었다. 왼편 몇 발자국 앞
에는 냉장고가 좌측 벽을 기대고 있다. 냉장고 뒤로는 개수대가 보
인다. 냉장고의 문이 열려 있다. 깜빡 잊고 닫질 않았나 보다. 그런
데 나를 헤매게 한 여기서 복도로 나가는 출입문은 어디에 있지?
둘러보니 등 뒤에 있었다. 냉장고 문을 닫으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다가가 보니 냉장고와 개수대 사이에 조그만 받침대 하나를 볼 수
가 있었다. 그 받침대 위엔 크기가 조그만, 수화기 없이 말함과 듣
기 전환버튼만 있는 모양새로 봐서, 간이용 인터폰이 놓여져 있는
것을 장기하는 볼 수가 있었다. '……사장실과 탕비실에 연결된 인
터폰으로 호출을 받고 차를 내가죠' 라고 설명해 주었던 미스 박.
그럼 이 인터폰이 사장실과 연결이 된 인터폰인가? 그럼 이 벽이
사장실과 접해 있는 벽이군……. 그런데 인터폰이 올려져 있는, 키
가 장기하의 대퇴부 상단쯤 돼는 나무로 된 조그만 받침대 뒤쪽이
맞닿아 있는 벽에 구멍 하나가 나 있음을 장기하는 볼 수가 있었
다. 그 구멍은 검지와 중지 정도가 여유 있게 들어갈 정도의 대략
4센티 전후의 지름이었다. 그 구멍으로 가는 전화선 한 가닥이 들
어와서는 받침대 위의 인터폰으로 향하고 있었다. 왜 인터폰선을
이 구멍을 뚫어 넘겼을까? 벽을 두들겨 보았다. 묵직한 울림과 손
등의 느낌으로 봐서 내벽 같아 보였다. 그래서 천장으로 넘기질 못
하고 이 구멍을 뚫었던 것 같았다. 장기하는 그 구멍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구멍의 높이는 바닥에서 사람 눈의 높이 근처여서 구멍
을 쳐다보기엔 몸의 자세는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사장실이 보였다. 형광등 불빛이 샐 틈새가 없는 공간의 구멍을
넘어 암흑 속에 잠긴 사장실 쪽으로 영사기의 주사선처럼 빛은 넘
어가고 있었다. 그 빛과 광경을 살피기엔 그리 좁지 않은 구멍의
크기로 인해 사장실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의 밤을 밣히
는 불빛이 사장실 창을 넘어 들어와 암흑을 어느 정도는 몰아내고
있었으나, 이쪽에서 구멍을 통해 건너간 불빛이 더욱 강해 사장실
어디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ㅈ세히 보니 그 어디인가는 사
장실의 책상 뒤로 보이는 가죽으로 된 등받이가 높고 큰 회전의자
였다. 그건 단순한 책상이 아니라 주인의 권위를 말해 주는 듯 크
고 육중한 목재로 된 업무용 테이블이었다. 저 자리에 모레면 새
주인이 앉는다.
너무 지체한 것 같아서 이제 그만 나가려고 구멍에서 얼굴을 떼
어 몸을 돌리는 장기하 앞에 책장이 보였다. 그 책장 옆, 등 뒤에
위치한 복도로 나가는 출입문 건너편 끝 쪽 벽에는 커다란 행거가
보였고, 그 행거에는 옷들이 수북히 걸려져 있었다. 아까 저것이
거치적거렸었나 보다. 묘한 느낌이 장기하를 행거 앞으로 끌어당겼
다. 행거 앞으로 갔다. 손을 뻗어 행거에 걸려진 옷들 중에서 왼쪽
끝의 옷을 잡아 보는데 손의 움직임에 따라 너불거리던 옷 사이에
서 코를 톡 쏘는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나프탈렌 냄새였다. 창도
없는 밀폐된 공간이라 옷의 좀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리라는 생
각이 들었다. 이 행거에 걸려져 있는 옷들은 여직원들의 유니폼이
다. 여자의 옷이다. 그럼 이 옷들에게선 여자 냄새가 나야 되는 것
아닐까, 장기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자락들을 세어 보았다. 영
업부의 미스 김, 미스 조. 관리부의 미스 박, 미스 현. 그리고 총무
부의 미스 리, 미스 최, 그리고…… 정은주. 그러나 옷은 족히 스무
벌은 넘는 것 같았다. 장기하는 여름철이라 요즘 입고 있는 하절기
유니폼과 같이 보관된 동절기 유니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직원
들은 하절기엔 반소매 블라우스를 입는다. 장기하는 행거 오른쪽
끝에서 옷걸이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오른쪽에서는 나프탈렌 냄새
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옷걸이의 어깨엔 반소매 흰색 블라우스
와 그 위로 감색 베스트가 단정하게 걸쳐져 있었다. 장기하는 그것
을 얼굴 가까이 댕겨서 눈을 감고 얼굴의 피부로 촉감을 느껴 보
았다. 부드러웠다. 여자의 블라우스의 질감이 이렇게 부드럽고 하
늘거리는 것이었다니. 그래서 여자의 팔 끝자락에서 블라우스는 한
없이 나붓거리나 보다. 장기하는 블라우스에서 부드러운 여자를 느
낀다. 그러나 그 옷걸이를 걸고 옆에서 끄집어 낸 바지걸이에 집게
로 매달린 스커트는 달랐다. 블라우스보다는 두꺼운 질감이 느껴졌
다. 장기하는 그 두꺼움은 아마도 여자의 비밀스러운 곳을 보호하
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어느 정도의 가벼움
과 부드러움으로 나붓거릴까? 흔들어 보았다. 스커트는 블라우스만
큼은 나붓거리지는 않고, 너붓거렸다. 아마도 이 스커트가 유니폼
이 아니라 대학 때 그녀의 플레어 스커트였다면 이것도 한없이 하
늘거릴 땐데……. 서울 근교 위성도시의 캠퍼스였지만 시골에서 올
라온 장기하에겐 캠퍼스는 묘한 뜨거움이었었다. 길었던 겨울이 시
니브로 작별을 고하고 그 끝자락마저 자취를 완전히 감춘 계절이
돌아올 때, 캠퍼스의 들녘뿐만 아니라 그녀의 스커트 자락에도 꽃
이 피곤 했었다. 파란 바탕에 형형색색의 꽃이 프린트되어 그녀의
아래를 감싼 채 하늘거리던 플레어 스커트. 그런 그녀를 멀리서 지
켜만 보았던 장기하에겐 그녀의 꽃무늬 플레어드 스커트의 하늘거
림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녀를 쓰러트려서 마치 캠퍼스의 꽃들을
전사한 듯한 그녀의 스커트 자락을 걷어올리면 거긴 뜨거움으로
충만해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던 날이면 장기하는 수음
이라고 해야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장기하는 스커트를 걸고 옆의 책장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 책
장은 행거와 개수대 사이의 구석진 벽에 위치하고 있었다. 너비는
한 자 반이 채 안돼 보였으며, 키는 장기하의 늑골쯤에 닿는 조그
만 4단 짜리 책장이었다. 맨 위칸의 책 몇 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칸들에 놓여진 물건들로 봐서는 여직원들이 사물함으로 쓰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칸엔 여러 종류의 화장품들이 빼곡이 놓여져 있었
다. 립스틱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개나 되었다. 그것들은
열 개나 되는 다양함만큼의 다양한 케이스의 색깔로 있었다. 장기
하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뚜껑을 열어 보았는데, 같은 붉은색 계통
이었지만 색상은 서로 미묘하게 달랐다. 립스틱 옆에는 파란색, 검
정색, 흰색 등 립스틱의 다양한 케이스처럼 여러 종류의 색깔로 둥
그런 모양을 한 플라스틱 케이스가 놓여져 있었다. 그것이 파운데
이션 케이크라는 것을 모르는 장기하는 케이스를 벌려 보았다. 왠
지 여자를 벌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장기하의 손은 미세하게 떨려
왔다. 안에는 여자의 살결이 있었다. 그 살결의 색은 참으로 고왔
다. 아마 세상의 여자들은 이 미묘하고도 다양한 색깔들로 자신들
을 그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장기하는 아래칸으로 시선을 옮
겼다. 거기에는 여자의 은밀함이 있었다. 몇 장의 팬티가 둥그렇게
말려져 있었으며, 그 옆에는 브래지어 몇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많은 켤레의 흰색 양말들이 있었다. 요즘엔 사
내 여직원에게서 스타킹으로 감싼 다리보다는 양말 차림새를 주로
볼 수가 있는데 이것들인가 보다, 했다. 그 옆엔 포장되어 있는 스
타킹들이 있었다. 그 스타킹들은 위칸의 화장품만큼은 아지만, 다
양한 색상들이었다. 포장지엔 검정색, 흰색, 살색, 커피색 등 자신
의 색깔을 인쇄된 글자로 말하고 있었다. 그중 커피색은 포장지에
'커피색 1호' '커피색 2호'라고 각각 쓰어져 있었다. 몇 개의 스타
킹은 포장 없이 그냥 맨살로 있었는데, 책장 안으로 천장의 조명에
그늘이 져서 스타킹의 정확한 색깔은 알 수가 없었다. 장기하는 그
중 하나를 손에 집어 들어보았다. 다리보다 촘촘하게 짜여져 짙은
색깔로 보이는 팬티 모양에 양쪽의 다리가 붙어져 있는 그것은 커
피색이었다. 장기하는 갑자기 가슴이 떨려 왔다. 여직원 중에서 커
피색의 다리는 정은주 말고도 볼 수가 있었지만, 이 스타킹이 혹시
정은주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러
운 손길로 그걸 만져 보았다. 깔깔한 촉감이 묘한 흥분을 일으켰
다. 그리고 그걸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나일론의 독특한 냄새가
났지만 장기하에겐 그건 마치 여자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여자, 나
에게도 여자가 있었으면……. 장기하는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오기
시작함을 느꼈다. 이젠 어느 정도는 익숙헤진 외로움이지만…….
그때 '쿵 땡…… 드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벽을 타고 울
린 소리라서 진동으로 느껴졌지만, 저 소리는 분명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벨 소리와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누구지……? 핸드
폰을 꺼내 보았다. 핸드폰의 숫자가 열 시가 넘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젠장, 벌써 두 시간이나 흘렀군. 그런데 이 시각에 누구란
말인가. 그 소리가 난 후 들려 오기 시작한 발자국소리가 점점 커
지고 있음을 장기하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의 방향이 꼭 이쪽
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혹시 여직원이라면, 젠
장 여기로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장기하는 불부터 껐다. 다시
탕비실은 암흑만이 남았고, 누구인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에 정수기
와 냉장고의 모터음도 장기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장기하는
저 발자국 소리가 만일 탕비실 앞에서 멈춘다면, 그래서 탕비실의
문을 따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에 쇼룸으로 나갈 요량
으로 쇼룸과 접한 문 앞에 섰다.
드디어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멈춘 발자국소리의 위치로 봐서
는 여기는 아닌 것 같다. 휴! 다행이다…… 그럼 총무부? 잠시 후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가 나더니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 그리고 문
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옆방에서 나는 것 같이
가까웠다. 이상하다. 옆방에서 나는 소리라면 이 시각에 쇼룸도 아
닐 것이고, 그럼 사장실? 이 시각에? 그리고 누가.……? 장기하는
아무래도 총무부에서 나는 소리가 텅 빈 심야의 검은 공기에 펴져
가깝게 들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정말 가야지 하고 조심스럽
게 쇼룸으로 나가는 문으로 가려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암흑만이 있어야 할 이 공간에 언제부터인가 아주 미세했지만,
불빛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을 느낀 것이다. 둘레를 돌아보니 벽의
구멍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구멍? 벽에 왠 구멍이지? 아, 참.
저 구멍은 아까 저 구멍을 통해 사장실을 보았던, 사장실과 접한
벽에 나 있던 구멍이지? 그럼 사장실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건
데…… 주인도 없는 사장실에 누구지? 장기하는 쇼룸으로 나가는
것을 미루고 다시 그 구멍으로 향했다. 도대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구멍으로 사장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사장
책상의 회전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뒤로 돌
려진 회전의자의 등받이가 커서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
나 팔걸이에 담배를 쥔 손끝이 보였고, 그 위로 담배 연기가 포물
선을 그리며 천장의 형광등 불빛에 파랗게 굴절이 되면서 사라지
고 있었다. 그가 회전의자를 돌렸다. 그는 오 전무였다.
'이 시간에 오 전무가 웬일이지? 더구나 저 양반이 사장실엔
왜…….'
오 전무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언가에 화가 나
있는 표정인 것 같아 보였는데, 상기된 얼굴 색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디선가 술이라도 걸친 득듯 했다. 한동안 회전의자에 앉아서 담
배만 피워 대던 오 전무는 답답한 듯 그의 셔츠 깃에 꽉 조여 있
던 넥타이를 풀어헤치면서 입을 열었다. "젠장, 내가 왜 이 자리를
빼앗겨야 하지." 그의 노기 띤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연신 회전의자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때였
다. 핸드폰 벨소리가 정적을 가르기 시작했다. 장기하는 갑작스런
핸드폰 벨 소리에 화들짝 놀랐으나, 그 벨 소리나 위치로 봐서는
오 전무의 것 같았다. 맞았다. 오 전무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핸드
폰을 꺼내 폴더를 열자 그때서야 벨소리가 멈췄다.
"나? 사장실에 있어. 이리로 와."
통화는 짤막했다. 그럼 누가 또 온다는 말인가. 오 전무의 통화
가 끝나자마자 다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벨 소리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발자국소리. 그러나
이번의 발자국소리는 아까 오 전무의 발자국소리보다는 가벼운 울
림으로 번져 왔다. 하이힐의 똑깍,거림 보다는 무거웠으나, 남자의
구두 발자국소리보다는 가벼운 소리였다. 여자인 것이 틀림없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 계세요?"
맞았다. 여자 목소리였다. 이제 그만 주의해서 쇼룸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디면 오 전무 몰래 계단으로
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움직이려던 장기하는 그 목소리가 귀
에 익은 음성이라 구멍에서 눈을 떼는 것을 멈추었다. 오 전무 쪽
으로 여자 한 명이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구멍을 통해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정은주였다.
이 야심한 시각에, 아무도 없는 빌딩의 사장실에 지금 오 전무
와 정은주만이 있다. 난 지금 구멍을 통해 사장실을 엿볼 수가 있
다. 어쩌면 둘의 관계의 실체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김 대리를 통
해서 전해 들었었던 미스 박의 그날 호텔에서의 목격, 그 목격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장기하는 호흡이
거칠어졌다. 구멍으로 보이는 건너편 사장실 광경이 흔들리고 있다
고 느낀 장기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떠한
예측도 배제한 채, 오로지 둘의 행동만을 지켜볼 생각으로 구멍 건
너편으로 보이는 사장실 광경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당연히 유니폼이 아닌 개인 옷을 입고 있지만, 그
녀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위에는 반소매 오버 블라우스와 아래는
하얀색 바지 차림이었다. 감색의 블라우스는 플랫 칼라의 끝과 소
맷부리 솔기선 위에 가는 하얀색의 라인이 둘러져 있었으며, 단추
도 하얀색이었다. 그 하얀색들은 비록 조그만 부분들이었지만 블라
우스의 감색 원단으로 인해 선명도의 대비는 더욱 뚜렷해 보였다.
그 아래의 하연색 바지는 가벼워 보였다. 그 하얀색 바지는 엉덩이
부분은 타이트했지만 내려올수록 통이 점점 넓어져서 그녀의 움직
임에 따라 마치 캠퍼스의 플레어 스커트처럼 하늘거렸다. 그 하늘
거리는 바지 안으로 그녀의 다리 실루엣이 하얗게 드러나 보였으
나, 허벅지 중간쯤의 바짓가랑이부터 안감 때문에 허벅지 위의 실
루엣은 사라져 버렸다. 마치 발이 없는 통이 아주 넓은, 아까 장기
하가 보았던 팬티 스타킹을 신은 것처럼 보이는 하얀색 바지였다.
그 바지 아래로 맨발의 앞축이 트인 바지의 색과 같은 하얀색 샌
들이 보였다. 굽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으며, 통 또한 그리 가늘거
나 굵지도 않았다. 아마도 조금 전의 발자국소리가 저 샌들에 실린
그녀의 무게였을 것 같은 그런 하얀색 샌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지와 샌들과 같은 하얀색 켈리백(어깨에 매질 않고 손에 드는
형의 핸드백. 여우 출신의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애용했
다 해서 붙여진 스타일이다)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바지
모양새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약간은 야해 보였지만, 소녀적이면
서도 단정한 느낌의 오버 블라우스와 역시 소녀적인 이미지의 연
보라색 꽃모양의 헤어밴드로 장식한 포니테일(머리를 뒤통수로 빗
어넘겨 하나로 묶는 머리모양으로서 말꼬리 같아 보인다 하여 붙
여진 이름이다) 스타일의 머리로 평소와 같은 단정함에서 크게 벗
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유분방함과 로맨틱한 느낌을 풍긴다.
그런 정은주가 바짓부리를 하늘거리면서 오 전무에게로 다가가
고 있었다. 그런데 저 소녀 같아 보이는 오버 블라우스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 맞다. 오늘 낮 거리에서 본 소녀의 교복과
비슷하다. 마치 그 소녀가 회색 스커트를 흰색 판탈롱으로 갈아입
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음, 그 블라우스 마치 무슨 학생 교복 같아 보이는군. 예쁜데?"
회전의자에 앉은 채로 자신 앞에 서 있는 정은주를 바라보면서
오 전무가 말했다.
오 전무 저 양반 내 느낌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장기하는 그
런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 자리에 미련이 남으세요?"
오 전무를 내려다보며 정은주가 입을 열었다. 작지만 또렷한 발
음으로, 어떨 때엔 냉정한 느낌마저 드는 정은주의 음성은 오늘도
여전했디. 그러나 지금 오 전무에게 건네는 정은주의 목소리엔 어
느 정도는 살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에겐 저렇게 한번이라도 대
해 주지는 않았는데……. 장기하는 왠지 서글퍼졌다.
"미련? 미련이 아니지. 이 자리는 내 자리야, 내 자리가 되어야
해."
"그만 잊으세요. 이미 결정이 난 것이고 또 모레면 새로운 사장
님이 취임하시는 날이잖아요."
"사장의 결정은 잘못된 거야. 내 자리를 빼앗긴 거야, 젠장."
오 전무는 아직 노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자신이 앉아 있는 등받
이가 높은 회전의자의 팔걸이를 툭 치며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벽을 타고 메아리가 되어 약간은 울리는 감이 없진 않았으나, 밀폐
된 공간인 탕비실의 구멍으로 인해서 알아듣는 데엔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전 전무님이 사장이 되실 줄 알았는
데……."
"그게……. 그러지 말고 앉아."
오 전무의 말에 정은주가 주변을 살핀다. 구멍을 통해 보이는
사장실은 그 전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오 전무 건너편에 보이는
소파는 거리가 제법 되어 보였다. 그만큼 사장실의 공간이 제법 크
기 때문일 것이다. 정은주가 구멍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정은주는
다른 조그만 회전의자 하나를 손에 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오 전무
의 1미터쯤 건너편에 정은주는 자리를 잡고 의자에 앉는다.
"한 대 줄까?"
책상 위에 꺼내 놓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던 오
전무가 정은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또 피세요? 건강도 생각하셔야죠."
'젠장, 오 전무의 건강까지 염려해 주다니…….'
"괜찮아, 그리고 지금 내가 담배라도 피워야지 안 그러면…….
자!"
"됐어요. 전 회사에선 안 피워요."
정은주가 담배를? 언제나 단아한 모습의 정은주가 담배를 피운
다? 낯설었다. 일이 끝나면 담배를 물던 사창가의 여자들. 그 여자
의 입에서는 벌써 그 나이에 그러면 어떻하니,라는 말과 함께 뿜어
져 나오던 담배 연기. 장기하의 머리엔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애. 자, 사양 말고……."
정은주는 그제야 담배를 건네 받아 물었다. 오 전무는 팔을 뻗
어 불을 붙여 주었다. 정은주는 담배 한 모금을 들여 마신다.
정은주가 앉아 있는 회전의자는 오 전무의 것과 달리 머리받침
이 없는 낮은 등받이였다. 그 낮은 등받이 의자로 인해 정은주의
옆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연보라색 꽃모양의 헤어밴드로 장식
한 말총머리는 그녀의 옆얼굴을 돋아나 보이게 하고 있었다.
살찐 계란 같은 둥근 이마를 만든 선은 안와상공에 이르러 짙고
검은 눈썹을 가늘고 섬세하게 그리고 나서 외씨버선 같은 콧등을
타고흘러 적당한 두툼함으로 흡입력 있게 보이는 입술을 만들고는
가냘픈 목선으로 흐르다가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가 붕긋한 봉오리
의 가슴을 만들더니 조붓한 배로 들어갔다가 오른다리를 왼다리
무릎에 포개어 앉은 흰색 판탈롱의 오른쪽 무릎을 향해 치달아 오
르다가 무릎을 넘어 다시 넉넉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와서는 부드
러운 나뭇가지의 선으로 발등을 그리고 나서 흰색 샌들 안으로 사
라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오른다리에 가려진 오른손에는 가냘프고 섬세해서
원래 굵기보다 더 가늘어 보이는 담배가 들려져 있었다. 그 담배는
섬세한 정은주의 움직임으로 오른다리에서 떠서는 그녀의 핑크빛
입술에 삽입되었다가 푸른 연기로 공중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 아름답다' 장기하는 지금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는 정은주
의 자태가 아름답다는 것 외엔 달리 표현할 말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파워게임에서 진 거지."
오 전무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파워게임이요?"
"내가 방심을 했어. 박 상무와 이 상무가 내 사람이니 안심을
하고 있다가 그만……. 김영진이와 최상명이가 내 뒷통수를 때리더
군."
"김 전무님과 최 상무님이요?"
"그래! 그놈들이 사장 편을 들더군, 젠장……."
"김 전무님이야 원래 사장님 친척이니깐 그렇고……. 최 상무님
이요?"
오아시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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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토도사 2022.11.30 15:30
토도사 평생주소는 https://토도사.com/
토도사 2022.11.30 15:30
야설 일본성인만화 토토 카지노 무료정보 토도사 https://www.tdosa.net
쥬니1140 2022.11.30 18:26
오아시스1은 어디로 갔어요??
토도사 2022.11.30 19:41
[@쥬니1140] ㅎ 누락된거 바로 업데이트 해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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