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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 7부 - 가을이의 방문

TODOSA 1 101 0

7부-가을이의 방문.


'어라...여기가...'

아침햇살이 눈을 사정없이 후비는 판에 승민은 힘겹게 눈을 떴다.급하게 마신 술이라 그런지 머리가 띵했다.향기

로운 냄새가 났다.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약간은 어지러진 방...

'으음...내방이 이렇게 옷이 널부러져 있었나...청소좀 하고 사는건데..근데 다 여자옷이네....!'

실눈을 뜨던 승민은 눈앞에서 슬기나가 속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잠깐...이게 무슨 상황이지?'

승민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채윤에게 문자를 보내 술을 마셨고, 그녀는 취해버려서 윤서가 데리고 갔었다.

파라솔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가을을 만나서 잠깐 이야기를 했고...그리고..그리고...

'헐!!!!!!!'

어렴풋이지만 기억이 났다.자신은 어제 슬기나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말이 뜨거운 밤이지 무턱대고 달려드는 자

신을 슬기나가 받아준것이나 다름없었다. 속옷을 모두 입은 슬기나가 힐끗 자신쪽을 돌아보자 승민은 눈을 꾹하

고 감아버렸다.

"으이그...이 녀석 그렇게 안봤는데 술취하니까 완전 개네?"

살짝 실눈을 뜨자 슬기나의 허리라인이 보인다.아슬아슬하고 힙겹게 그녀의 큰 가슴을 브라가 받치고 있었다.그

녀는 누워있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이 놈 안자는거 같은데..."

슬기나의 중얼거림에 승민은 움찔했다.이마위로 식은땀이 살살 흘러내린다.

"일어나 이자식아!"

슬기나의 고함에 승민은 파드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누..누나 굿모닝."

"뭐 굿모닝?이게..."

슬기나가 손을뻗어 자신의 볼을 꽉 꼬집었다.볼이 꼬집히고 빙글빙글 돌려지는 와중에도 슬기나의 몸매에서 전

혀 시선을 뗄수 없는 승민이었다.

슬기나는 한참이나 승민의 볼따구를 꼬집더니만 몸을 돌려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디라도 가는지 간

단히 화장을 마친 상태였다.

"누나 어제는 내가..."

"됐어.너라고 실수 안하니."

슬기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듯 치마와 브라우스를 입었다.

"아..응..미안해요."

"그래.솔직히 일어난 모습이 섹시했으면 내가 달려들었을텐데.넌 별로 안섹시하다."

슬기나의 태연한 발언에 푹 하고 한숨을 쉬는 승민이었다.

"어라?근데 누나 어디가요?"

그러고보니 평소에 슬기나의 차림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점잖은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였다.슬기나는 거울을

보며 립클로즈를 살짝 바르더니 몸을돌려 승민을 바라보았다.

"오늘 면접이 있어.어때.이뻐?"

승민은 멍하니 슬기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슬기나는 진한 화장을 주로 했지만,화장을 지우거나 연하게 하

면 엄청 청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게다가 연한 화장에 클래식한 정장이라니.키도 커서 옷발이 잘받는 그녀

인지라 승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풉..바보 같기는."

마지막으로 스타킹을 신는그녀.잘뻗은 다리가 승민의 눈앞에 아른거렸다.자신이 일방적으로 돌격하고 난 다음

날도 저렇게 밝은 모습이라니.정말 슬기나는 승민이 아는 사람중에 가장 쿨한 사람이었다.

"그럼 간다.너 나갈시간에 알아서 나가도록 해~"

"근데...무슨 면접인데요?회사?"

"그래.나 취업준비생인거 잊었어?제법 큰회사 사장 비서자리가 있길래.면접보려고."

"아...그럼 같이 나가요.누나 문도 잠궈야..."

슬기나는 이러저리 뻗친 머리로 자신의 휑한 아랫도리를 이불로 가리고 있는 승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만 그

에게로 고개를 숙였다.동시에 승민의 눈망울이 커졌다.

쪽.

그녀가 승민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춰준 것이었다.은은한 향수냄새와 함께 립클로즈 탓인지 살짝 사과향기가 났

다.

"립클로즈를 너무 많이 발라서 좀 나눠주는 거야."

슬기나는 아직까지 멍 때리고 있는 승민을 보며 피식 웃더니 구두를 신고는 현관을 나섰다.

"안잠궈도 되니까 대충 닫고 나가.그리고 렌지위에 국끓여놨으니까 먹어. 그리구 담부터 그렇게 술먹고 찾아오면

죽을줄 알아."

승민은 문을 닫고 나가는 슬기나를 보며 살짝 시계를 보았다.오늘 그는 수업이 없었다.그냥 연구실에만 가면 되

는 날이었기에 그는 여유롭게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평소 슬기나 답지 않게 자신의 옷을 잘 정

리되어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어제 일을 생각하니 또 살짝 흥분이 된 승민이었지만 기분은 많이 풀려있

었다.

'고마워요.누나 덕분에 진짜 훌훌 털어버릴수 있게 됐어.'

물론 섹스의 힘은 아닐것이다.하지만 슬기나는 자신이 정신이 들고나서도 왜 그렇게 술을 먹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무관심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승민은 왠지 슬기나가 자신을 배려해준거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우와...의외네..'

김치를 송송썰어넣어 끓여놓은 국을 보고는 승민은 눈이 휘둥그레 졌다.평소 그녀의 이미지는 요리를 하나도 할

줄 몰라 인스턴트 식품에 쩔어있을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먹음직스럽게 국을 끓여놓았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

문이었다. 대충 슬기나 집에서 혼자 맞는 조촐한 아침밥상을 차린 승민은 그릇채로 국그릇을 들고는 벌컥벌컥 국

물을 들이켰다.

"크아아아!"

매콤한게 들어가니 속이 뻥 뚫리는 쾌감이 느껴졌다.승민은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수저를 들었다.근 몇

년만에 먹어보는 정말 맛있는 아침이었다.

-

"야 우승민!이리와봐!"

"응?"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연구실 동기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모두 자신의 실험에 순순히 스탭으로 협

조해주는 동기들이었다. 물론 언제나 고마움보다 연구실을 가득 채우는 남자의 향기에 항상 한숨을 푹 내쉬었던

승민이기도 했지만...

"항공사 쪽에서 협조 실험 하겠다는 팩스가 왔어!"

"정말?"

승민의 눈이 커졌다.몇년동안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자신의 연구가 이제는 본격적인 실험단계로 접어든 것

이었다.실험에서 받은 인증은 승민의 커리어로 남을 것이었고, 성공한다면 그간의 평범한 대학생들이 누리는 모

든것들을 잊고 살아온 승민에게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야..축하한다 우승민."

"고마워.니들 덕분이다!"

"술한잔 마셔야 하지 않겠냐?오늘 같은날!"

"음..그런가?"

"그런가..라니?당연히 니가 쏴야 하는거 아니냐?"

승민은 멋적게 웃었다.생각해보면 자신을 위해 애써준 친구들에게 술한잔정도는 쏴야 할것만 같았다.게다가 오늘

은 토익학원도 가지 않는 날이었다.

"좋아좋아.오늘 끝나고 내가 쏠게."

"오우 좋아!"

승민이 자신의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세명의 동기들을 보며 피식 웃고 있을때 연구실 문이 활짝 열렸다.

"여어...니들 왜이렇게 좋아해?좋아하는 AV배우 노모라도 출시됐어?"

오늘도 형준이 연구실 청춘들을 위해 간식을 싸들고 들어온 것이었다.역시나 먹을복은 있는 놈이야...라고 승민

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내가 술을 쏘기로 해서."

"와..진짜냐?엉아도 가도 돼냐?"

"먹을복있는 놈은 이래서 부럽지.와라임마."

씩 웃던 형준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은근하게 승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엉아 애인도 데려와도 되냐?"

형준의 애인이라면 윤서를 말하는 것이었다.승민은 잠시 그녀의 웃는얼굴이 빠르게 스쳐갔지만 이내 살짝 웃었

다. 어제처럼 착잡하지 않은거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간밤의 술로 그녀를 싹 씻어내린 모양이었다.

"그래.데려와."

"크흐흐.역시 이래야 내 친구답지."

승민은 피식 웃다가 갑자기 채윤이 떠올랐다.

'그래.그래도 대학생활 거의 유일하게 친한 여후배인데.채윤이를 안부르면 섭섭해 할거야.'

승민은 이따가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연구자료를 정리해서 클립에 꼽았다.승민이 분주히 움직

이는 모습을 지루하게 바라보던 형준이 무언가 생각난듯 승민을 잡아끌었다.

"야..맞다.너한테 물어볼게 있어.나와봐."

"뭐?"

형준이 살짝 연구실 동기들 눈치를 보더니만 승민을 밖으로 끌어냈다.승민역시 동기들 눈치를 살짝 보고는 형준

을 따라나섰다.

"니가 나한테 물어볼게 다있냐?"

확실히 형준이 자신에게 무언가 물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그역시 자신처럼 영재와 천재소리를 두루 듣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번에 쎄끈한 연구를 하나 들어갔거든."

"뭔데?"

"약품개발."

"니가 그런것도 해?"

"임마.엄연히 보면 약학도 화학의 연장선일 뿐이야."

"암튼...그래서?"

형준이 살짝 주변을 둘러보더니 몇장의 종이와 정체를 알수없는 약품통을 꺼냈다.종이에는 복잡한 화학식과 형

준이 해놓은 듯한 메모가 잔뜩 적혀 있었다.

"근데...이게 전혀 진전이 없어.니가 나보다 근소한 차이로 좀 머리가 좋으니까 한번 봐라."

승민은 집중해서 형준이 써놓은 서류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비록 기계쪽이

지만 과학쪽은 정통한 승민인지라 형준의 실험의도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너...이자식.."

"야야.죽이지 않냐?"

"너 끝내 범죄자의 길을 걷겠다는 거냐?"

승민의 물음에 형준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피식 웃어보였다.

"야.이게 어디봐서 범죄냐?내가 무슨 마약제조 했냐?"

"암튼 난 안해.니가 연구해서 완성해라."

형준이 내민것은 다름아닌 최음제.즉,흥분제를 만드는 도식이었다.

"야야.그러지 말고 좀 부탁한다.내가 쓰려고 그러는게 아냐 임마.이건 언제까지나 한국의 약학 발전에 이바지

하고픈 내 소망의 산물이다."

"약학의 발전이 아니라 성인용품시장의 발전이겠지 인간아."

형준은 늘상 그게 문제였다.좋은두뇌를 좋은 쪽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점 말이다.그가 승민과 필적하는 명석

한 두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단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늘 똑같았다.첫째로 출석을 밥먹듯이

빠졌으며 둘째는 늘 내주는 레포트를 교수의 의도를 한참이나 벗어난 전혀다른 방면으로 써서 제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승민의 관점에서 봤을때 그는 여자를 꼬실때에 있어서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이큐를 써먹는 아주

특이한 인간이었다.

"게다가..이런건 안전허가를 받지 않으면 출시할 수 없어."

"야야야. 내가 지금 제약 업계에 데뷔하는걸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건 언제까지나 개인적인 연구야."

"으휴.."

승민은 머리를 감싸고 푹 한숨을 쉬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같이 자란 친구는 정말이지 단 10퍼센트도 철이

들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Yohimbe 에 Horny Goat Weed 성분까지...이거 그냥 봐도 발정제잖아. 너 설마..."

승민이 무언가 생각이 난듯 형준을 노려보았다. 형준은 손사레까지 쳐가며 부정했다.

"야!아냐! 내가 쓰려는거 아니라니까!"

"정말이냐?"

"미친놈. 우리엄마가 약사신데 내가 이런 의약법을 어기는 짓을 할거 같냐? 이건 언제까지나 연구라니까."

순간 윤서에게 완성된 흥분제를 먹이는 형준을 상상한 승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자신이 알기로도 형

준은 그렇게까지 썪은 인간도 아니었고, 여자랑 못자서 환장하는 놈도 아니었다. 맘만 먹으면 꼬시는 형준이 저

런걸 사적인 용도로 쓸 필요가 없었다.

"야 좀 부탁좀 들어줘. 이건 공대인으로써의 호기심이라니까? 게다가 이게 잘 풀리면 마취 쪽에 혁명이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하기야 승민도 예전부터 쭉 궁금해하던 분야이기도 했다.AV나 야한 소설을 읽으면 항상 등장하는 흥분제.심지어

무협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이 최음제를 들이켜 곤경에 빠지는 장면은 꼭 단골로 나오곤 한다.늘상 그 실체가 궁금

했던 승민인지라 호기심이 생겼다.

"좋아..알았어.뭐가 문제인건데?"

"으흐흐흐.역시 내 친구답다.여기서 보면 말야.이 부분에서만 약품이 응고가 되어버려.뭐가 문제인지 밤새 고민

해도 모르겠어."

"니가 밤새 고민을 했다고?"

".....사실 한두시간 정도는 고민했어."

"...."

"암튼 부탁한다 승민아.이따 술마실때 보자 나의 친구여."

형준은 피식웃으며 복도 끝으로 사라져갔다.형준이 주고간 물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 승민은 몇번이나 고개를 갸

웃했다.

'이거...해도 되는건가...나 자신도 궁금하긴 하지만...'

-

"자..건배!"

형준이 신이난듯 건배를 권했고 승민을 제외한 다른 동기들이 쭈뼛쭈뼛 팔을 뻗어 어색하게 건배했다.그들의 대

학생활 술자리에서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이른바 '여성과의 동반 술자리'가 펼쳐져 있는 까닭이다.이들의 마

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서는 내내 싱긋웃으며 형준의 옆에 딱 붙어 앉아 연신 조잘거렸다. 승민은 자신의 옆에

서 말없이 앉아있는 또 다른 여학생을 바라보았다.뭐 때문인지 승민을 쳐다보지도 못하고는 그냥 홀짝홀짝 맥주

만 마실뿐이다. 말이 마시는 거지 그냥 입술만 담궜다 떼는거 같았다.

"채윤아.너 어디 아퍼?"

"네?아..아뇨.."

채윤은 짧막하게 답해버리고는 고개를 또 푹 숙인다.승민으로써는 어색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어휴..그때 선배한테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사실 채윤은 오늘 윤서에게 승민이 쏘는 술자리가 있다고 했을때 어떻게든 빠지려고 했었다.승민과 단둘이 마실

때 자신이 뻗어버려서 윤서를 불러 자신을 옮겼던 승민.생각하면 할수록 창피해서 견딜수 없었다.그녀같은 완벽

주의자로써는 자신의 실수를 승민에게 보인것은 엄청난 치욕이었다.

'이래서 다신 술을 안마시려고 했던건데..'

채윤은 몇년전의 일을 생각해내고는 또 우울해졌다.살짝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승민을 바라보았다.연구가 끝난

것에 관해서 동기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의모습.왠지 모르게 전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약간 자신감이 붙은거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물론 이야기를 할때에 살짝 어색한 느낌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지만,적어도 자신이 처음

학교 식당에서 봤을때와는 전혀 다른사람같이 보일 정도였다.

'이 선배에게 그때의 나같은 모습은 보여서는 안돼..'

채윤은 굳게 다짐하고는 맥주에서 끝내기로 마음먹었다.소주만 먹으면 뻗어버리는 체질탓에 그녀는 아예 소주쪽

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반대로 승민은 동기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채윤이 신경쓰여 견딜수가 없었다.이제 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한

승민이었다.공대인의 밤 행사를 계기로 호칭도 오빠로 바뀌었고,서로 문자도 종종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맨 처

음에 채윤이 보내줬던 문자는 이미 지워진지 오래일 정도로.하지만 오늘 채윤은 너무나 이상했다.자신을 흘끔흘

끔 보다가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훽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가만히 있는 그녀가 어색해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

봐도 그녀는 그저 단답형 대답만 하고 있을뿐이었다.

'아씨..뭐가 문제지...'

곧 다른 동기들과도 말을 잘 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형준은 윤서와 히히덕 거리기 바빴고 다른녀석들은 그저

웃으면서 서로 이야기들 하기 바쁘다. 자신과 채윤만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였다.

'설마...'

승민은 슬쩍 곁눈질로 채윤을 바라보았다.언제나처럼 하얀 피부와 가냘프게 뻗은 목선.화장기는 별로 없지만,피

부가 워낙 좋은탓에 그녀는 어두운 술 집 조명속에서도 빛나 보인다.

'나를 좋아하나?채윤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승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이쁜아이가...그럴리가..'

그냥 여자를 모르는 자신이 보기에도 채윤은 정말 도도하고 남자보는 눈이 까다로워 보인다.게다가 구태여 남자

가 꼭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 어리버리한 타입도 아니다.그녀는 똑똑했고, 똑 부러지는 아이였다. 하지만 승민은

왠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자신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아쉽기도 했다.

'잠깐...그럼 내 마음은?'

승민의 시선이 이번에는 윤서쪽으로 돌아갔다. 늘상 같은 머리지만 언제봐도 너무나 귀엽게 어울리는 포니테일

스타일.위아래로 동그랗게 큰 눈에 앙증맞은 입술. 게다가 그녀는 늘상 웃었다. 입을 살짝 가리고 너무나 예쁘게

웃는 그모습에 승민이 멍해졌던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예전과는 다르다.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이건만 그녀를 봐도 가슴이 시리지 않았다. 미치도록 좋아한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관심이 있던 승민

으로써는 자신의 마음인데도 그것이 너무 의문이었다.  이제 공식 커플발표를 하고 형준의 옆에 꼭 붙어서는 안주

를 먹여주는 닭살의 극치인 그 장면을 보아도 기분이 씁쓸하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저게 올바른 그림이라는 생

각이 들 정도로 둘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채윤이...때문일까?'

어느덧 자신은 채윤에게 신경쓰고 있었다. 확실한건 윤서를 마음속에서 훌훌 털어버린건 슬기나의 덕택이겠지만

아무래도 채윤의 행동이 심하게 마음에 걸린다.

"야..그래서 말야. 내가 윤서에게 뭐라고 했냐면.."

"아이참!오빠 그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라니깐..."

자신의 동기들은 형준이 윤서와 맺어지게 된 짧은 러브 스토리를 부러움과 경외에 찬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리며

경청하기 바빴고, 윤서는 부끄럽다면서도 계속해서 웃으며 그를 만류하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앉은 일곱명이지만

왠지 자신과 채윤은 동떨어져 있는것만 같았다.

'으..도저히 안되겠어. 어색한건 더이상 싫어.'

승민은 앞에있는 소주잔을 원샷으로 비우고는 대뜸 채윤에게 빈 술잔을 내밀었다.

"채윤아 나 잔비었어."

"네?아..네.."

채윤이 술병을 들더니 승민의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왠일인지 술잔이 살짝 넘쳐 소주가 승민의 손에 약간 묻었

다. 그녀가 당황하자 승민이 어색한 톤으로 크게 웃었다.

"하하하! 채윤이 사랑이 넘치는구나."

"네에?그게..."

'어라...형준이가 평소에 이렇게 말하면 여자애들이 웃던데...난 왜이런 반응이 오지..'

승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또 자신의 말을 해명하고 있었다.

"아..그게 난 농담으로.."

"아...예"

승민은 이제 자신이 답답해 지기 시작했다.적어도 친한 후배인 그녀와 이렇게 어색하다는 것은 너무나 숨막히는

것이었기에.

"채윤아.진짜 무슨일 있어? 너 오늘 이상한거 같아."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거면 있긴 한거네.말해봐 뭔데?"

채윤은 망설이듯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또 다시 둘만의 정적이 흐른다.

"내가..좋은 카운셀러가 될수는 없어."

몇초후 떨어진 승민의 말에 채윤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뭐...너도 알다시피..난 조리있게 말하지도 못하고, 게다가 유머러스 하지도 않거든.상대편 고민같은거...들어

줄수 있어도 속시원하게 이야기도 못해주는 스타일이야.대화보다는 혼자있는 시간이 많았거든. 근데 니가 아무

리 원래 말이 없는 아이라해도 너무 어색하잖아.오늘만큼은 좋은 카운셀러가 되어 볼테니까 한번 말해봐."

자신이 말하고도 어색한지 띄엄띄엄 말하는 승민을 보며 채윤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제일때문이에요.오빠한테 너무 미안해서."

"뭐가?"

"술먹고 뻗었잖아요."

"뭐야..고작 그거야?"

뭔가 대단한 고민을 기대했던 승민은 맥이 탁 하고 풀린듯 말했지만,채윤은 발끈하듯 언성이 높아졌다.

"고작 이라뇨.전 술먹고 뻗고 이런거...정말 딱 질색이라구요.저는 스무살때...."

채윤은 갑자기 말을 뚝 하고 끊었다.무언가 괴로워 보이는 표정에 승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혹시제가 실수했나요?-

첫 술자리때 채윤이 자신의 집에서 어쩔수 없이 잔 적이 있었고,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실수했냐는 질문을 몇

번이고 했었다.

'스무살때...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승민은 알수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으로 봐서는 지우고 싶은 기억인 모양이었다.

"넌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어."

채윤이 고개를 살짝 돌려 승민을 바라보았다.승민은 자신의 손에든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그냥 잠들었을 뿐이야.나한테 실수한것도 없고, 그냥 평소처럼 이쁜얼굴 그대로 잠만 들었어.그러니까 그렇

게 자책하거나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채윤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물론 승민은 술잔을 비우느라 그녀의 표정변화를 보지 못했지만.

"고마워요...그렇게 말해줘서."

"사실일 뿐인데 뭘."

승민은 살짝 웃는 채윤을 보며 안심했다.이제 다시 어색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한결 부드러워진 그녀의

표정에 안도하던 승민의 머리속에 무언가가 스쳐갔다.

"근데 넌 외동딸이야?"

"아...네.갑자기 그건 왜요?"

"생각해보면 난 너와 꽤 친하다고 생각했고,수업도 몇개 같이 듣는데...너에대해 모르는게 많은거 같아서."

"그러네요.오빠랑은 그런말을 전혀 안했네요."

채윤의 눈이 호기심이 물든 눈으로 바뀌었다.생각해보면 승민과의 대화는 대부분이 학업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

이었다.

"오빠는요?오빠도 외동이에요?"

"아..응.나도 외동이야."

승민으로써도 오랜만에 채윤덕분에 자신의 가족관계를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자취하는데 말고 원래 집은요?"

"원래는 경기도쪽에 살아.경기도 치고는 조금 밑에 쪽이긴 하지만.하하"

"아..."

승민은 이상하게 채윤의 목소리톤이 급격하게 밝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녀역시 자신이 다른사람의 신

상을 관심있게 듣고 있는건 처음있는 일 이었다.

"음..저기...남자친구는 사귄적있어?"

"네?"

갑자기 의외의 질문이 튀어나오자 채윤은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번."

"와..정말?"

솔직히 채윤처럼 까다로운 아이가 남자를 사귀어봤다고는 생각안했던 승민이었다.

"네.대학교 들어와서 잠깐. 그때는 멋모르고 사귀었던거 같아요.지금생각해보면 많이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랬구나."

"그래서 후회가 되요.처음사귄 남자는 대부분 잊지 못하는데 저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그냥

마음가는데로 해버린거 같아요.내 감정을 내가 모른다는 말...그제서야 알았거든요."

"아..."

승민은 조금 기뻤다.그녀와 처음해보는 사적인 내용이 가득한 대화.이미 일행들은 무슨대화를 하는지 들리지 않

았다.

"사실은..그래서 대학에서 이렇게 묵묵히 공부만 하는거 같아요.그냥 그런 무의미한 만남으로 시간을 보내는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운 거라서."

"그..그렇기야 하지."

승민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그녀는 성격이 원래 도도 그 자체였던 것이 아니었다.그저 아직 까지 진정한 사랑

을 못해본 탓일 것이다.

'마치...나처럼 말이지.'

그 생각이 들자 승민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씁쓸해져서 술을 마시려고 술잔을 들었다.

"오빠는...한번도 없는거죠?"

"윽...응...한번도 없다..."

불쌍한 형상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승민을 보며 채윤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여자 손도 안잡아 본건가요?키스같은 스킨쉽도?"

"풉!"

승민은 자신도 모르게 술을 뿜었고 채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당황하는 승민을 바라보았다.

'뭐..뭐라고 말해야 하지.'

확실히 그는 사귄여자는 없지만 첫키스의 경험이 있었다.슬기나의 집에서 했던 설레이고도 달콤했던 첫키스.

"이..있어 그런적은."

"정말요?"

채윤은 의외라는듯 승민을 바라보았다.당연히 없다 라는 가정하에 물어본 모양이었다.

"누...군데요?"

"그..그게..."

같이 토익학원 다니는 여자라고 말하면 최근이라는 사실이 들통날 것이다.물론 큰 일이 나는것은 아니지만 왠지

자신이 쉬운만남을 하고 다니는 변태선배가 될것만 같았다.

"동네 누나랑...."

승민은 적당히 오해받지 않을 선에서 사실만을 간추려 대답했지만 그녀답지 않게 호기심어린 질문은 계속 이어지

고 있었다.

"언제요?"

"뭐..뭐?"

"언제했냐구요."

순간 승민은 채윤이 술이 취한게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무언가 그녀답지 않게 관심에 가득찬 눈빛.승민은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뭐...얼마 안됐어."

"흐음."

왠지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뉘앙스의 승민을 보며 채윤은 수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자자..건배하자 건배 하하하"

채윤은 뭔가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승민이 내민 술잔에 맥주잔을 살짝 부딪혀 주고는 한모금 들이켰다.입가

에 묻은 거품을 살짝 입술을 오무려 없에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그렇다면...'

승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자신도 채윤이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어서였다.그녀가 사귈때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이쁜 채윤이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뛴다.그녀의 성격

상 좀 매치가 안되서 그런지 키스이상의 스킨쉽은 잘 떠올려지지가 않았다.

"너...너는?"

"네?뭐가요?"

"너는 그...사귈때..."

우물쭈물하는 승민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채윤이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는 승민을 보고 눈을 흘겼다.

"그런건...여자한테 묻는거 아니에요."

"아..응."

쪽팔려져서는 금새 머리를 긁적이는 승민을 보더니 채윤은 살짝 웃더니 다시 건배를 권했다.

"오늘은.좋은 날이잖아요.그리고 아까 말하지 못했는데...연구 진척된거 축하해요 오빠."

승민은 멍하니 그녀가 내민 술잔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따라 웃었다.공대인의 밤 파티에서 드레스를 차려입었던

그때보다 지금의 수수한 차림의 채윤이 훨씬 더 이뻐보였다.

"응!"

-

형준은 끊임없이 2차를 가자고 졸랐지만, 연구를 하던 녀석들의 체력은 1차에서 모두 소진된 모양이었다.게다가

윤서와 형준의 파렴치한 닭살행각은 외로움을 벗삼아 대학을 다녔던 다른 공대인들로써는 참을수 없는 고문과도

같았다.결국 자신의 의견이 가볍게 무시당하자 형준은 윤서와 좀더 데이트를 한다고 하고는 나가버렸고, 대부분

기숙사에 사는 다른 동기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승민역시 채윤을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 주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왔다.

'참 다행이야.윤서를 보고도 이제 아무렇지 않게 된데다가, 채윤이와도 사이가 좋아져서..'

생각만해도 흐뭇한 날이 아닐수 없었다.마지막에 채윤과 대화하면서 어색할때마다 술을 들이켰더니 알딸딸한게

적당히 기분도 좋았다.

끼이이이..

"아...저거 언제한번 문짝 분해해서 기름칠을 하던지 해야겠다."

승민은 오늘도 귀를 틀어막고는 철문을 닫았다.그리고는 침대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으아아..편하다.귀찮은데 이대로 잘까?"

얇은 외투를 벗으려던 승민은 손에 잡히는 이질적인 감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주머니에 있는 물건들을 꺼냈다.

"아..이걸 잊고 있었네."

형준이 주고간 연구자료였다.생각해보니 형준이 연구를 자신에게 떠맡겼다는 생각도 들었지만,어차피 이 연구를

한다한들 형준이 학계에서 인정받을리는 만무했다. 세상 어느 학계가 최음제에 높은 점수를 주겠는가. 이건 철저

히 승민역시 호기심이 동해서 받아들인 제안이었다.

"어디보자..."

승민은 벌떡 일어나 책상위에 대충 자료를 펼쳐놓고 관찰하기 시작했다.취기가 올라와서 알딸딸했지만 타고난 연

구원 체질인건지, 금새 형준이 대충 세워놓은 가설을 따라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건가.."

형준이 준 약통에는 여러개의 가루가 혼합되어 들어있었고, 조그만 통에 각각 따로 보관되어 있기도 했다.승민은

천천히 형준이 대충 세워둔 가설에 따라 가루를 혼합했다.물론 전공이 아닌지라 약간은 서툴렀지만,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평가를 받는 승민에게는 비교적 간단한 실험이었다.

'뭐야...여기서 막히는게 당연하잖아.'

승민은 한숨을 푹 쉬었다.역시 형준의 성격다운 실험전개였다.지나치게 자신의 좋은 두뇌를 믿는 형준의 성격이

고대로 반영된 것이다. 전혀 수학적인 알고리즘없이 무턱대고 전개한다는 것은 설계도 없이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승민은 대충 다시한번 이론을 가다듬고는 가루를 혼합했다.형준에게 일어났던 응고현상이나 이질

감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흠...대충.완성인가."

허여멀건한 가루약이 하나 완성되었다.하지만 승민은 곧 난관에 봉착했다.피실험대상자가 없기 때문이었다.게다

가 실험용 흰쥐가 있는것도 아니고...

"이거..내 몸에 써볼까?"

사실 흥분제의 성분은 여성에게 더 먹히도록 되어있었다.애초에 중추신경을 자극한다는것은 맞는 것이기에 승민

은 자신의 몸에 실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뭐.베스킨 라빈스 창시자도 아이스크림만 무턱대고 먹다가 지방껴서 죽었다고 하는데.이정도야 뭐."

자신은 남자인지라 극단적인 상황에는 자위로 해소가 가능했다.게다가 승민은 자위에 상당히 익숙해져있는(?)

엄청난 솔로경력을 자랑하는 공대인이 아니던가.

'좋아좋아.한번 해보지뭐.인체에 엄청 유해한 것도 아니고.'

승민은 물에 살짝 가루를 탔다.눈에 띄게 허옇게 둥둥 뜨더니만 수저로 몇번 저어주니 이내 투명한 물색으로 돌

아오며 적당히 녹아내린 모습이었다.그는 심호흡을 한번하고는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물맛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지라 별 반응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야.별거 아니네.효과는 나중에 오는건가?"

띵동.

조금더 마셔보려던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아홉시가 넘어가는 이 시간에 찾아올 손님이란 없었기에 승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형준인가?"

그는 테이블위에 그대로 물잔을 둔채로 밖으로 나갔다.

"오빠!"

"에엥?"

문을열자 전혀 의외의 인물이 서있었다.얌전하게 묶은 머리에 동그란 눈.살짝 작은 키지만 성숙한 몸매.뭔가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귀여운얼굴. 그리고 언제나처럼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새.

"나..집세 잘 냈는데..."

그녀는 가을이었다.언니인 봄이와 쏙 빼닮았지만 승민은 그녀가 자신을 오빠라고 불렀던 것에서 그녀가 가을임을

유추한 것이었다.

"피.그거땜에 온거 아닌데요?"

승민은 문득 뻘쭘해지는 자신이 느껴졌다.그때야 술에 취해서 그녀에게 평소와는 다른 인격으로 말을 막했던것

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어?그럼?"

"저 들어가도 되죠?"

"아 청소를 안했....응 들어와."

오지 말려고 했건만 그냥 무턱대고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승민은 말을 살짝 바꿨다.

"우와.오빠 의외로 깔끔하게 하고 사네요."

"이..이게?"

"네!내방보다 나은데요."

순간 가을의 방이 얼마나 개판일까 하는 생각에 승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무슨일이야?"

"그때 오빠가 너무 재밌어서요.술사주세요."

"뭐?"

황당해 하는 승민의 앞에서도 가을은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키는 작았지만 비율이 좋았고,제법 글래머인 탓에

면트레이닝 복장도 너무 귀엽게 잘 어울렸다.

"난..이미 좀 마셨는데"

"에이~어때요.그냥 간단하게 맥주같은거 없어요?"

가을은 살짝 냉장고를 열더니 여기저기를 살핀다.살다가 처음겪어보는 여고생의 난입에 승민은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었다. 형준이 놓고간 것으로 추정되는 맥주캔이 가을의 손에의해 냉장고로부터 쭈욱 딸려나왔다.

"찾았다!헤헤."

승민은 갑자기 난입한 가을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쉬고는 역시 형준이 갖다 놓았던 과자몇개를 꺼내고는 침대

앞에 테이블을 펼쳐 주었다.

"근데 왜 이시간에?"

"저 야자 하잖아요.옷갈아입고 왔어요."

"아..그랬지.근데 이시간에 나와도 엄마가 뭐라고 안하셔?"

"에이 몰라요 그런거.이제 오빠말대로 매번 혼나는 케릭터 되기 싫어요.풉..그거 알아요?진짜 오빠말대로 겨울

이 때려줬어요. 이제 그녀석이 심부름가요."

"하하..그래 잘됐네."

"음..근데 오빠 술 안마시니까 그때의 분위기가 안나오네?"

승민은 멋적게 웃었다.사실 그때는 우승민의 다른버젼이라고 봐야 옳을거 같았다.가을은 승민이 따준 캔을 한모

금 들이키더니 크~하는 소리까지 냈다.

'요즘 여고생들 무섭구나...'

확실히 가을은 날라리 느낌은 전혀 없었다.그냥 활발하고 밝은 성격정도.하지만 갑자기 난입해서는 맥주를 마시

며 크~하는 소리를 낸다니.승민으로써는 평생 못할 구경이 아닐수 없었다.

"저 사실.오빠를 그동안 오해했었어요."

"응?뭘?"

"그냥 혼자 사는 궁상맞은...야동이나 보는 변태로."

"하..하하.."

"근데 아니더라구요!오빠는 진짜 재밌고 착한사람인거 같아요.물론 제대로 이야기한건 어제일이 전부지만."

승민은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가을을 보고 살짝 웃었다.

"뭐.나도 너 오해했어.늘상 까칠해 보이길래."

"그건, 엄마심부름 하는게 늘 귀찮아서 그런거에요."

"아 그래?예전에 전화통화하면서도 욕을 엄청하던데."

"네?제가 언제요?"

"몰라.꽤 몇달전이었는데 길거리가면서 니가 통화하는걸 봤거든.근데 진짜 욕을 장난아니게 하더라."

가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뼉을 딱 쳤다.

"아! 그거 우리 언니일껄요.입이 좀 거칠거든요. 그리고 전 욕 안해요."

"아...맞다.둘이 쏙 빼닮아 있었지."

확실히 둘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정도로 판박이었다. 자신이 채윤을 업고올때 거칠게 내뱉었던 봄이가 아니던

가.가을의 말대로 승민이 본 그녀는 최 봄이었던 모양이었다. 가을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승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승민역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주로 그녀가 묻는것은 대학생활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오빠는 미팅도 많이 해봤죠?"

"아니.한번도."

"에?정말요?"

가을은 놀랍다는듯 맥주캔을 입술에 대고는 승민을 바라보았다.또다시 그 이야기를 하니 울컥하고 올라오는 승

민이었다.

"어.난 공대거든.여자가 거의 없어.물론 최근에 두명 복학하긴 했지만.난 그냥 공부만 했어."

"아..오빠 공대구나.그럼 수학이나 과학 디게 잘하겠다.그쵸?"

"응?뭐 디게 라기 보다는....응 디게 잘해."

"하하하..뭐야."

그것만 했으니까.라는 말을 하려다 승민은 그만두었다.그나마 요새는 전과다른 생활패턴으로 흘러가지 않는가?

솔직히 말해 가을이 쳐들어온것은 의외이긴 하지만 싫을리 없었다. 이제는 인정해야했다.자신의 생활패턴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아직 봄날이 왔다!라고 말하기엔 일러도 확실히 전보다는 훨씬 개선된 삶이 아닐수

없었다.자신이 평생을 통털어 요즘처럼 여자와 많이 이야기한적도 없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첫키스와 첫경험의

추억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럼 오빠 나 수학과외해 주면 안되요?"

"으응?과외?"

"으음..음..제가 돈이 없어서 과외비는 못드릴지 몰라도 가끔 와서 밥해드릴게요.저 요리 되게 잘해요!"

"아..그게.."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려던 승민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연구도 이제 실험단계이겠다 별로 신경쓸것이 없을 것이고

토익학원역시 늘상 나가는게 아니었다.게다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가을은 밤 늦게나 되어야 돌아온다.

"그래.해줄게."

"와!오빠최고! 역시 오빠가 짱이라니까요.그 과학대회인가 뭔가 2등한 오빠보다 더!"

".....내가 그 이야기도 했어?"

"네!재밌었어요.하하하."

가을은 뭐가 좋은지 연신 웃었다.승민은 도대체 형준에 대해 뭘 이야기했는지 곰곰히 생각해야만 했다.

"근데...오빠가 말했던 그 여자분은 다 잊었어요?"

승민은 가을의 질문에 움찔했다.톡톡튀는 고교생 다운 당돌한 질문이었다.승민은 잠시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웃었다.

"다 잊었어.잊고 말고 할것도 없었어.내가 막 따라다닌것도 아닌데 뭘."

가을은 다리를 모으고 앉아 뚱한 표정으로 승민을 빤히 바라보았다.왠지 자신을 속속들이 관찰하는거 같아서 승

민도 가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여고생 특유의 호기심가득한 눈빛이 승민을 쭈욱 훑었다.

"아마.그언니도 오빠같이 좋은사람 놓친거 후회할거에요."

"그...럴까?"

"그럼요!오빠는 일단 착하구....음.....머리도 좋은거 같고.....음...또..."

애써 자신의 장점을 짜내려 노력하는 솔직한 가을의 모습에 승민은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

"그..그래 그만하자."

"네.키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몇개 안되던 맥주캔이 동이났다.승민은 솔직히 즐거웠다.가을은 여태까지의 그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아이였다. 그냥 그 나이또래의 발랄하고 귀여운 여고생이었다.채윤이나 슬기나 같은 미인

상이라기 보다는 앙증맞게 생긴 귀여운 여고생. 게다가 승민으로써는 고맙게도 그녀는 말을 곧 잘했다.슬기나와

있을때 편했던 것처럼, 대화를 잘 못이끄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을같은 성격이 잘 맞았다. 그녀는 대학생활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소녀였고, 그녀의 환상속에 등장하는 꿈같은 생활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승민은 친절하게

아는것들을 모두 대답해 주었다.

"이런..맥주 더먹고 싶은데."

"아..근데 안돼."

"왜요?"

"넌 고등학생이잖아."

"칫.그럼 지금먹은건 뭐에요?소주도 줬으면서."

"그거야 그렇지만...더 먹는건 안돼."

"피.치사해요."

하지만 말고 다르게 가을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너무나 재밌고, 순진한 이 오빠가 내일부터 과외를 해준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쁜 그녀였다.

"그래도 오빠는 다른사람들 같지 않아요."

"응?뭐가?"

"우리 둘째오빠도 그렇고, 다른 대학생들도 그렇고.다 나를 어린애 취급해요.고딩이니 어쩌니. 근데 오빠는 나

한테 일일이 친절히 다 대답해주고. 술먹고 싶어하는것도 이해해 주고.오빤 진짜 되게 착해요."

"그..그래.착하기라도 해야지 어쩌겠니."

"하하 뭐에요 그 대답은."

같이 웃던 승민은 소주를 마신데다가 맥주를 몇캔 더 들이부어서 그런지 요의가 느껴졌다.

"나 잠깐 화장실좀."

"큰거에요?"

"으윽..."

킥킥거리는 가을을 뒤로하고 승민은 화장실로 향했다.왠지 우렁찬 물소리를 들려주면 살짝 챙피할거 같기도 해서

대충 수도를 틀어 놓고는 일을 보았다.

"오빠~이 테이블 위에 있는 물 마셔도 되는거죠?수돗물 아니죠?"

밖에서 가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난 약수마셔."

대충 대답해주고는 남은 볼일을 보던 승민의 머릿속에 천둥이쳤다.

'테...테이블위에 물!?'

다급해진 승민은 자신의 물건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맥주때문에 시작된 소변은 끊길줄을 모르더니 몇초후에서야

다 개워내 버렸다.

"가..가을아 잠깐!"

승민은 허겁지겁 지퍼를 올리고는 화장실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가을을 본 승민은 몸이 굳어져 버렸다.실험을

위해 약을 타놓았던 물. 물잔을 통해 그것은 가을의 입가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8부-금단의 묘약,그리고 의외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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