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의 날 2
무위(無爲)의 날 2
다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다. 견딜 수 없는 뻘쭘함이 우릴 거리로 내몰았을 때, 밖은 짙은 어둠에 계속해서 비를 거세게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내 손엔 그녀의 작은 손이 포개어져 있었다. 어쩌자는 것인가? 그녀의 시선은 오롯이 전방 저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문득 내 귀엔 Al Pacino(알 파치노)의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에 나왔던 탱고 음악이 나지막이 흐르고 있었다.
<Por una cabeza>(뽀르 우나 까베싸, By a head, 머리 하나만큼의 차이로)
말머리 하나만큼의 차이로 경마에서 아쉽게 진 것을 나타내는 경마용어인데, 여자의 거짓유혹에 속아 사랑에 실패한 남자의 심경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지.
그리고 유명한 대사가 흐른다.
- Donna : Ah… I think I’d be a little afraid. (아... 조금 두려워요.)
- Frank : Of what? (뭐가?)
- Donna : Afraid of making a mistake. (실수할까 두려워요.)
- Frank : No mistakes in the tango. Not like life.
(인생과 달리 탱고에는 실수가 없어요.)
It’s simple. That’s what makes the tango so great.
(간단해요. 그게 탱고를 더 멋지게 만드는 거죠.)
If you make a mistake, get all tangled up, just tango on.
(실수를 해서 스텝이 얽혀도, 탱고는 계속됩니다.[그게 탱고죠])
뭘 하려던 것도 아닌데, 비를 피하려던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새 내 호텔방 안으로 옮겨져 있었다. 비 맞은 생쥐꼴을 면하려, 그녀는 큰 타월 하나를 들고 샤워실로 사라지고, 대충 소파에 걸터앉은 나는 다시 긴 침묵속에 버려져 있다.
어릴 적 누에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종일 뽕나무 잎을 갉아 먹은 누에는 네 번의 허물벗기를 하고 난 후, 실을 토해서 ‘고치’라는 껍질을 짓는단다. 그리고 그 고치 안에서 몰래 다섯 번째 허물벗기를 한단다. 이후 번데기가 되고 나방이 되어 고치 한쪽 끝을 뚫고 나온단다.
이따금씩 화장실 문 저 켠에선 소나기(shower) 내리는 소리가 들릴 뿐인데, 그 공허한 침묵이 허물을 벗고 있을 낯선 아낙의 변신에 대한 상상력을 바짝 자극한다.
꼴~깍
잠시 정신줄을 놓고 있는 새, 커다란 흰 타올에 몸을 숨긴 한 마리의 나방은 살포시 뛰쳐 날아와 후닥닥 하얀 시트속에 몸을 감추고 숨어 버린다. 젖은 몸에 한기마저 밀려와 나도 할 수 없이 저 켠으로 사라질 밖엔. 방금 누에 한 마리가 허물을 벗던 곳엔 다시 소나기가 내리고 샴푸비누치약으로 한 달 주기로 재생되는 표피 구석구석을 씻겨낸다.
어둡다.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어둔 밤에 창마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그야말로 칠흑이다. 그렇지만 난 전기가 들어오기 전 성냥으로 호야등 심지에 불을 켜서 어둠을 밝혀본 적이 있던 터라, 화장실 불빛을 이용해서 영점조준 한 번만에 조준점과 탄착점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바깥을 둘러싼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온 찬 공기와 달리, 하얀색의 평평하고 얇은 고치의 안은 그녀가 몸으로 피워 올린 모닥불의 열기로 따스했다. 어둠속에 한 꺼풀 감겨진 채 가쁘게 숨 쉬며 돌아누운 형체의 윤곽이 서서히 익숙해진다.
어느덧 나는 Simon and Garfunkel(싸이먼 앤 가펑클)의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를 듣는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이보게 어둠이여, 내 오랜 친구)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나는 그대랑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왔다네.)
빛이 거의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촉각이 살아있어 그녀의 열기가 느껴지고, 후각이 살아있어 몽롱하게 하는 그녀의 내음이 전해지고, 청각이 살아있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흰 꺼풀로 꼭꼭 싸맨 형체의 잠들지 않은 미세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침묵의 시간을 견디다 못해 그녀가 반드시 돌아누웠고, 나도 색불이공(色不異空)이라더니 현자타임이 밀려왔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듀스(Deux)의 노래 <우리는>에서처럼, 벌거벗은 두 남녀는 뻘쭘할 뿐이다. 그 어색함을 피하려 타올을 두르고 등을 하나 켠다.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돌아서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인데...
그녀는 작았다. 루손섬 북동쪽 카가얀주의 칼라오동굴에서 5~6만 년 전의 키 121cm의 새로운 인류가 발견되어 Homo Luzonesis(호모 루소네시스)라 이름 지어졌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많던 어휘들이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침만 꿀꺽 삼키며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낼 즈음, 그녀의 땀 찬 작은 손이 살며시 포개어져 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Turn off the light! I’m shy. First time.“ (불 좀 꺼줘요! 부끄럽단 말이에요. 처음이라구요.”) 공(空)은 무(無)가 아니며, 공불이색(空不異色)이던가!
‘First time’의 의미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뭐가 첨이라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불을 끄러 일어섰을 때, 뒤에서는 사각거리며 허물 벗는 소리가 들린다.
목베개를 하고, 살짝 그녀를 안아본다. 작은 그녀를 몸위에 올리고 입술을 핥는다. 몸을 떤다... 양쪽 목을 훑고, 이미 딱딱해진 젖꼭지를 만지고 빨아본다.
여성은 악기와 같아서 연주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음색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New Age 피아니스트 Yanni(야니)의 공연에서 그 재수없게 생긴 아르메니아출신의 Samvel Yervinyan(삼벨 예르빈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심각한 질투를 느낀 적 있다. 활 하나로 4개의 줄에서 뽑아내는 그 어마어마한 음색이라니!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나 같은 자는 언감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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