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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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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 8부


은혜는 오늘도 생활정보지를 뒤적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마땅한 일자리는
없었다. 은혜는 생활정보지를 덮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 이렇게 넋을
놓고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사채업자들의 돈을
연체한 지도 한 달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신체 포기각서 등의 내용을 볼 때마다 은혜의 조바심은 커져만 갔다.
사실 이렇게 다시 돈에 쫓길 줄은 몰랐다. 아무리 불경기라지만 그래도 꾸준히
손님은 있었고, 그 돈으로 일수를 끊고 사채의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709호가 가게를 옮기고 싶다며 돈을 갚을 수 있냐고 물어왔을 때
은혜는 선뜻 그 돈을 갚았던 것이다. 그리곤 6시가 넘어서도 남편이 퇴근하기까진
손님을 맞곤 했었다.
하지만 그 날만 생각하면 은혜는 지금도 아찔하다. 은혜가 막 집을 나서려던 때에 2002호 일수아줌마가 다급히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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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새댁 다행히도 집에 있었네....”
“왜요..아줌마...”
“새댁..요즘도 가게에 나가나?”
“아뇨...저 요즘은....” 은혜는 비록 2002호가 소개시켜줬지만 웬지 숨기고 싶었다.
“그래...그래...여하 튼 다행이야...그 근처엔 얼씬도 말라고....”
“예? 아니...아줌마 왜요....”
은혜는 자신이 가게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을 했다는 사실은 잊은 채 놀라서
물었다.
“아 글쎄....누가 신고를 했는지 정마담이랑 아가씨들이 어제 저녁에 다 잡혀갔어...
TV뉴스에도 나왔대...글쎄...”
은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걸 느꼈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유부녀이던 유리의 남편이 신고했던 것이다.
유리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남편이 유리를 미행하다가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은혜는 자신이 퇴근할 때 급히 들어서던 유리와 마주쳤던 것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은혜도 잡혀갈 뻔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다리가 후들거려 은혜는 거의 외출을 못했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집의 벨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다.
그래서 집에만 있다 보니 일수도 밀리고 사채이자까지 밀리게 된 것이다.
다행히 2002호 아줌마는 사정을 짐작하는지 독촉이 덜했으나 사채업자의 독촉은
이제 도를 넘고 있었다.
특히 미스터하라 불리던 이용실에서 마주쳤던 사내는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오는 형편이었다.
심지어는 11시가 넘어서 전화를 걸어오는 적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남편이
2차 구조조정을 앞두고 외국계 은행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퇴근이 점점 늦어지는
덕택에 그럭저럭 위험한 고비를 넘기다가 남편이 연수를 겸해서 미국으로 출장을 간 것이 바로 어제였다.
오늘은 우선 사채사무실에 들러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집으로 찾아오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어제 남편을 배웅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받은 전화에서
사내가 최후통첩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떡하던지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은혜는 미국에서 걸려온 남편의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왔지만 마땅히 직장을 구하러 갈 곳이 없었다.
은혜는 정처없이 거리를 걷다가 오후3시가 넘어서는 것을 보고는 허겁지겁
사채사무실로 향했다. 사채사무실에는 또 미스터하라는 사내만이 있었다.
“돈은 가져왔겠죠?” 은혜를 맞는 사내의 얼굴은 냉담했다.
“저 그게...아저씨...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이봐요...한은혜씨... ” 사내가 고함을 빽 질렀다.
은혜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요...”
“저 그게 아니고....제가 사정이....”
“내가 지난번에 말했죠. 한은혜씨는 연체사실이 있는데다 담보도 없어서
또 연체하면 안된다고...여하튼 긴 말할 것 없이 오늘은 돈을 갚으시던지
아니면 담보라도 내놓으세요.”
“저 아저씨, 어떻게 한 번만 더....”
“이 아가씨 이거 말로는 안되겠네...” 말을 마치며 사내가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휙 은혜에게 던졌다. 지난 번 연기할 때의 계약서와 각서였다.
“거기 한 번 읽어봐...보름 연체하면 경고고 한 달 연체 때는 어떤지...”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다.” 은혜의 눈에 글자가 또렷이
들어왔다.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해놓고선 또 연체를 해...이 아가씨 보통 배짱이
아니구만..”
사내는 숫제 반말로 나가고 있었다.
은혜는 두손을 모아 빌며 사내에게 애원했다.
“아저씨 정말, 한 번만 봐 주세요. 딱 한 번 만 더...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그래...돈을 갚던지. 담보를 가져오라고...그럼 한 번 봐 줄테니...”
은혜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정말 마지막이에요. 한 번 만 더 봐주세요...네..으흑 아저씨...”
사내는 아무 말 없이 흐느끼는 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은혜는 계속해서 훌쩍이며 사정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사내가 서류뭉치를 하나 건넸다.
“읽어 보고 사인해, 지장도 찍고...”
눈물을 훔치며 은혜는 사내가 건네준 서류뭉치를 넘겼다.
“대출금 삼천만원...” 거기까지 읽고 은혜는 깜짝 놀라 사내를 쳐다보았다.
“왜, 하기 싫어? 그럼 돈을 갚던 지....”
은혜는 어쩔 수 없이 나머지 부분을 읽어 나갔다. 어느새 대출원금은 삼천만원으로
다시 천 오백만원이 늘어 있었다. 그리고 한 달에 갚아야 이자와 원금이 500만원
가까이 적혀있었다. 다달이 오백만원을 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정언니의 가게 일자리도 없는 지금 형편에....
은혜는 다시 사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500만원 씩은 도저히 어떻게 한 달에 300만원 정도로 좀 길게 하면...”
“이봐..아가씨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아가씨 뭘 믿고 우리가 기간을 길게 해줘 응?
그것도 많이 봐주는거야....”
“하지만 아저씨 어떻게 500만원 씩을 한 달에 벌어요...제발 조금만....”
은혜와 사내의 실랑이는 한참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내는 다른 서류뭉치 한 장을 던지며 읽어보라고 했다.
첫장을 넘기던 은혜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체포기각서...”
은혜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그러나 은혜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신체포기각서의 맨 끝에 자신의
이름이 버젓이 적혀있고 지장까지 이미 찍혀있었던 것이다. 날짜를 보니 지난 번에
추가 대출을 하던 무렵이었다. 정신이 없어 지장을 찍어주긴 했었지만, 당시에는
신체포기각서란 말이 없었음에 분명했다. 후에 따로 타이핑해 넣은 것 같았다.
은혜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사내가 말을 건넸다.
“이봐 한은혜씨, 그럼 거기 각서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물론 돈은 더 돌려주지...
우리도 뭔가 담보 하나 쯤은 가져야하지 않겠어?”
은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어떡할 거야... 본인이 선택을 해야지....”
신체포기각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은혜는 알고 있었다. 돈을 갚지 못할 때
그들이 하는 짓을 이미 보도를 통해 접했던 은혜로서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돈을 갚을 능력은 더더구나 없었다. 아울러 자신의 지장이 이미
찍혀진 각서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사내는 돈을 갚는 날짜를 연기하고 갚아야
할 액수를 줄여주는 대신에 신체포기각서의 이행을 촉구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 조금만 봐 주세요...한 달에 300씩은 꼭 갚을께요...”
은혜는 잠시 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그럼 그렇게 하지 그 각서 다음 장 읽고 지장찍어...!”
은혜는 사내의 명령대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 곳에는 달랑 두 줄 만이 덩그러니
적혀있었다.
‘상기인(한은혜)는 금일 부로 각서의 이행을 동의합니다. 2001년 모월 모일
한은혜’
은혜는 이를 악물고 지장을 찍었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눈물
한방울이 각서위로 뚝 떨어지고 있었다.
<9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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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토도사님의 댓글

  • 토도사
  •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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