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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멈춘 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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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멈춘 방 2부 

소라-29/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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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콜...


비가오고 있다.

세상을 온통 물속에 잠겨 버릴것처럼 쏟아붇고있다.

마치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그곳의 물이 한꺼번에 와르르 떨어지는것만 같았다.

연천인가 어디서는 물난리가 났다며 연일 아비규환의 지옥처럼 변해버린 마을을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보다 더한 지옥속에 파묻힌채 영글지도 못한 육채와 영혼들을 여전히 의미없는 시간속에 삭이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교실엔 형광등을 켜놓은채  간간히 들려지는 책장의 바스락 거림이 기분나쁘게 눅눅한 분위기를 흐트려 놓고있었다.

‘생리중’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창밖의 컴컴한 빗속을 응시한채 앉아 있었다.

가끔씩 턱을 괴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나가라고 열어놓은 새장속으로 억지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군 새처럼 시간이 멈춘 다른 세상속에 자신을 가둔 마네킨 같았다.

어쩌면 저렇게 그녀의 표정과 포즈는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만큼이나 변함없이 지루할까... 그런생각들과 내가다니던 모델스쿨의 여자애들처럼 모습을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들을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좁은 창문틈으로 밀려들어온 한줄기 바람이 몇개의 빛방울과 함께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드는게 보였고 두개의 희미한 눈동자가 내눈과 오버랩 된건 그때였다.

언제나 그 어떤 누구도 똑바로 바라보지 안던 그녀의 몽환적 시선이 일순간 내 천체를 덮쳤다.

내귀에 걸려 있던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글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재즈섹스폰 선율과 그녀의 시선과 창밖의 빗속풍경이 묘하게 어우러지며 내 생각들을 빼앗아가는것 같았다.

잠시후 의자하나가 드그극 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좁다란 책상틈을 스치며 언제나 창가 맨뒷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 다가오는게 보였다.

그 짧은순간 생각해 보건데 그녀가 아이들중 누군가를 똑바로 응시하며 다가온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눈을 계속 응시하고 있던 나를 내려다 보며 그녀는 작은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음악이니... 혹시... 댄스니?”

그녀의 가느다란 음성이 텅빈 나의 머리속으로 연기처럼 퍼져갔다.

나는 말없이 이어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잠시스친 그녀의 손은 누구라도 금방 알아챌만큼 차가왔다.

“재즈네... 빠른음악 이었으면 했는데...”

빠른음악?

어쩌면 그녀도 자신의 침묵이 지겨워서 였을까...

하지만 전혀 그녀에게서 느껴질 수 없는 말이였다.

그 나이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힙합이나 댄스를 들으려 했다는것도 나에겐 쉽게 다가오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빠른음악은커녕 느린음악 조차도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을만큼 그녀는  침묵속에 각인된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좀... 들어도 될까...?”

조용히 부탁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를 응시한채 였다.

“네...”

가느다란 그녀의 손이 책상위에 있던 은색 미니카세트를 말없이 집더니 원래있던 제자리로 언제 그랬던 적도 없다는 것처럼 되돌아갔다.

다시 그녀의 모습이 아까와 같은 포즈로 되돌아왔다.

다만 달라진것은 귀에꽂은 이어폰과 손에 들고있는 은색 미니카세트를 만지작 거리는것이 달라진 것이라면 달라진 것일뿐...

교실안의 흔적없던 그 작은 동요는 다시 몇몇책장의 바스락 거림속으로 잊혀져갔다.

자율학습은 저녁때가 되서야 끝이났다.

아직도 밖엔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학교 건물 현관에 섰을때 게때처럼 왁자거리며 밀려나오는 패잔병들로 인해 꽤나 부산스러운 모습 이었다.

저멀리 운동장엔 색색의 동그란 원들이 흔들거리며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쏟아지는 빗속으로 녹아서 흡수되버린 것처럼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그자리에 서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목적지로 비와함께 흡수되버린 운동장은 요란한 빗소리외엔 오로지 정막뿐이었다.

군중이 떠나버린곳에 남겨진 허전함과 어쩔수없는 인간의 욕구인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갑작스레 알콜의 뜨거움이 느껴지고 싶었다.

‘어디로 가지...’ 마치 갈곳이 없는 행려병자처럼 멍한 생각에 사로잡혀있을그때,

“음악... 잘들었어”

적막을 살짝 밀어내며 평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카세트를 든 손 하나가 나를향해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운동장 먼곳을 응시한채 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반짝하며 걸려있는 얇은 금목걸이를 보며 카세트를 건네받았다.

‘자기가 샀을까...’

카세트를 건네주던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왔다.

그리고 언제나 짧은 한마디 외에는 입을 열지않는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어떤여자든 버릇처럼 칠하고 다니는 루즈조차도 바르지않은 메마른 입술...

“언제나 그래요?”

“... 뭐가?”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동그란 시선을 나에게로 향하며 물었다.

“손이... 언제나 차갑나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손이 차가우면 마음이 따듯하다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은것 같은데... 그냥 언제나 그래...”

빨간색 자동우산을 펑하고 펴며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괜한 소리까지 했다는 표정으로 금새 굳어지는것 같았다.

사실 난 그녀의 표정을 묻고 싶었다.

아니,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묻고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보고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궁금증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듯 상체의 반을 빨간 원안에 감추고 빗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그 속에서 나의 쓸데없는 궁금증에 침묵시위라도 할것처럼...

나는 천천히 블록을 따라걷는 그녀를 뒤쫓으며 시위를 저지하려 했고 그녀의 침묵시위가 실패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집이 어디세요?”

그녀가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그런 질문을 받아본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약간은 멍한 시선을 나에게 던졌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단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무관심하기와 무관심 받기였으니까...

“댁이... 어디세요?”

말하기를 잊은것처럼 바라보기만 하는 그녀에게 다시물으며 내 커다란 원을 그녀가 들고있는 작은 원위로 덮었다.

그때까지도 그냥 서있기만 하던 그녀는 자신의 빨간원을 접어 작은 막대기로 만들며 내말엔 대답도 없이교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그녀의 집이 어디쯤인지는 알고 있었다.

얼마전 친구녀석의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오던길에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대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를 스치듯 보았었다.

작은 쇼핑백 하나를 들고 조금은 빠른걸음으로 어디가를 향하던 그녀를 보며 어디가냐고 소리쳐 보고싶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살고있는그녀를 그때 처음 본것도 의아 했었다.

2년반동안 한번도 마주친적이 없었다니... 왜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감추려 하는지...  잠시 스친 그녀의 얼굴에 많은 의문들이 떠올랐었다.

“그건 왜물어...”

교문을 빠져 나오며 그녀는 이제야 생각났다는듯 물었다.

여전히 멀리를 응시한채 였다.

교문밖에 드러난 도심의 거리는 이미 축축히 젖어있었다.

안개속처럼 뿌연 빗속의 거리는 인공의 불빛들이 서둘러 하나둘 밝혀지며 밀려드는 어둠을 억지로 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같은 방향이면 같이가려구요”

그때 흥건히 젖은 한무더기의 바람이 우리를 와락 껴안으며 달려왔다.

그녀는 갑작스런 바람의 애무가 귀찮은지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내 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놀리듯 뒤쪽으로 도망쳐 달아나자 엉겁결에 그녀의 얼굴을 가린 내손을 슬며시 밀치며 내 얼굴을 힐끗 올려다 보고는 다시 걸음을 옴겼다.

“너는 어느 방향인데...”

가느다란 목소리가 우산위로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혀 들릴듯 말듯했다.

어느방향...

무슨뜻인가...

나를따라오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나와는 반대방향으로 가겠다는 뜻인가...

그녀의 목소리 톤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답도 들으려 하지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있다.

그녀의 하얀 샌들이 또각이며 바닥에 젖은채로 기절해있는 블록들을 깨워주고 있었다.

마치 ‘정신차려 정신차려’라고 쉴새없이 말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수다스러운 그것의 주인은 여전히 말없이 걷기만 하고 있다.

빗속 어디선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저녁공기속에 나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하는 유혹이 섞여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옥으로된 작은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처마에 걸려있는  작은 미등이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속삭이듯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냥... 어디가서 저녁이나 먹을까요...?”

그녀는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빗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영원히 비가 멈추지 않을것 같았다.

금새 어둠이 보도블럭 아래까지 짙게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피신하기로 했다.

마왕처럼 엄습하는 어둠으로부터, 도시를 쓸어버릴것같은 빗줄기로부터, 허기의 욕구로 부터...

작은 나무대문을 삐그덕 밀고 들어간 한옥구조의 내부는 의외로 조용했다.

모시한복에 하얀 광목앞치마를 두른 외소한 할머니가 어서오라며 우리를 반겼다.

주인이고 주방장이며 종업원인 할머니의 안내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뭐 먹을래?”

아이들 다루듯 얘기하는 할머니의 말투가 재미있었다.

할머니가 펼쳐준 메뉴판을 그녀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사겠다는 말에 그녀는 웃긴다는 표정으로 메뉴를 보더니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학생인 나를 의식해서인지 싼 메뉴를 고른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한달 수입이 적어도 그녀만큼은 되리란걸 그녀는 알지못했다.

아니면 무의식중에 버릇처럼 그 단어만이 눈에 띄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혼자 살고있다.

새장처럼 자신을 가둔 방안에서 스스로를 외면한채 사는 그녀가 먹는 먹이라곤 고작해야 ‘라면’ 아니면 ‘김치찌개’였을것이  다.

“아니요... 여기 버섯전골 하구요... 소주한병 주세요”

난 그녀의 말을 묵살한채 할머니를 올려다 보며 메뉴판을 접었다.

그녀는 또다시 피식하며 웃었다.

아마도 자신의 말을 묵살한것 보다 내가 소주를 주문한것에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조금만 기다려”하며 메뉴판을 들고 할머니가 나가고나서 잠시후 상이 차려지고 소형가스렌지위에  찌게가 올려졌다.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소주병을 든 내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으로서의 어색함인지 아니면 나의 행동이 건방져 보였는지 그녀는 예의 그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내잔을 먼저채워 입속에 털어 넣었다.

찌릿하고 후끈한 소주의 느낌이 비어있는 위속으로 퍼져갔다.

다시 두번째 잔을 채우며 병을 내려 놓으려할때 잔을든 그녀의 하얀손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한잔 줘...”

이번엔 내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잔을 채웠다.

그녀는 천천히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투명하고 맑은 소주가 그녀의 입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나는 다시 그녀의 잔을 맑고 투명한 액채로 채워주었다.

술은 순수하다.

그것의 본질은 언제나 변함없이 한결같다.

술이 상했다거나 변질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순수하지못한 인간만이 술의 순수함을 이기지 못하고 변질되어 간다.

눈만 뜨고 있으면 살아있다고 착가하는 사람들은 술을 먹어선 안된다.

그들이 술을 입속에 붇는순간 그들의 가식과 오만과 조잡한 슬픔따위가 결국 구토로 결집되어 쏟아지기 때문이다.

찌개가 끓기시작 할때쯤 우린 소주한병을 이미 비워내고 있었다.

나는 소주한병을 더 주문하여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내 잔을 그녀앞으로 내밀었다.

“한잔 주세요”

말없이 소주를 따라주는 그녀의 손이 잠시 떨리며 병과 잔이 따르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결혼은 안하세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듯 소주잔을 입술에 대고 아끼듯 조금씩 마시다가 슬며시 내려놓았다.

“해야지...”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왠지 우울하게 느껴졌다.

“애인은... 있어요”

“지금은 없어”

작년 가을에 헤어졌다고 했다.

나는 더이상은 묻지 않았다.

지금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그곳에 띄워 흘려보내려 애쓰는 그녀를 그냥 놔두고 싶었다.

신파처럼 흐를 과거따위는 그녀에게 이미 의미없는것이다.

내 과거가 그렇듯...

보글거리는 찌게의 김을 사이에두고 말없이 소주가 비워지고 있었다.

“너... 왜 항상 나를 쳐다보니...”

“네?”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나는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수업시간에... 계속 나를 보고 있었잖아...”

한번도 눈이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의외였다.

무관심... 그것은 그녀의 일상이었고 신조처럼 느껴졌었다.

단한번도 누구에게 시선을 준다거나 받으려 하지안던 그녀가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니...

“그냥... 할일이 없어서요...”

나의 궁색한 대답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소주잔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했다.

빈 식탁이 군데군데 놓인 넓다란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소리없이 한참을 굴러다녔다.

나는 그것들을 놀래켜 내쫓듯 렌지를 끄며 그녀를 보았다.

“이제 일어나요...”

“그래...”

그녀도 내가 그 침묵들을 내쫓는걸 도와주었다.

작은 가방을 집어들고는 스커트 아래로 보이는 하얀 다리를 펴며 나를 따라 일어섰다.

식탁위엔 빈 소주병 세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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