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 추억 - 숫처녀의 신입생 환영회
작성자 정보
- 작성자 토도사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조회 418
본문
-아무리 여대라고 하지만, 남자놈들 만날 때는 조심해야해. 세상은 보기보다 녹
녹치 않아. 제일 먼저 니 옷가짐부터 단정해야 한다.
-에유, 당신도... 뭐 이렇게 좋은 날부터 다 큰 딸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허허... 내가 뭐 없는 말 하는가. 이 사람이... 무릇 대학생이면, 준사회인은
되는게야. 명심해 두거라. 숙이 니가 대학생이라면, 이젠 주위의 어느 누구도 숙
이 너를 어린아이 취급은 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넌 앞으로 무얼 하고, 어딜 가
든, 어른으로서의 행동이란 걸 알아야 해. 그럴수록 더더욱 행동 조신해야 하는
거구. 알겠니?
입학식이 끝나고, 시내로 나와 이른바 호텔 레스토랑이란 곳에서 식사를 하며 아
버지가 하신 말씀이었다. 핀잔이나, 야단을 치시는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아
니 오늘의 숙에게만큼은 오늘따라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던 귓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합격통지서를 받자마자 어머니가 사주신 근사한 치마정장을 입
고, 자기가 입학하게 된 여자대학의 첫문턱을 비로소 넘은 것이었다.

-핏... 알았어요, 아빠, 괜히 그러셔... 내가 뭘 잘못이라도 했나, 뭐...
-어허, 이 애비가 언제 우리 딸 혼내려고 그랬냐? 다 잘 들어두면 좋은 게지...
아버지도 다 학교생활 해봐서 하는 말인게야...
-참, 그만좀 하세요...
그녀의 어머니 역시도, 오늘따라 아버지의 잔소리를 막아주고 있었다. 아마도 숙
의 어머니 눈에는,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보다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딸의 날
씬한 옷차림이 더 관심의 대상일 것이었다. 숙은 아무래도 좋았다. 비록 아버지
가 사주는 식사가 퍽 일류 호텔의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원래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오른 아버지는, 무슨 말씀을 하시건 간에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했다. 그녀
스스로는 그런 아버지가 때로는 너무 전근대적이라고 속으로 타박하고 있었으니
까.
아무리 아버지가 일장연설을 하신다고 하더래도, 지금은 아버지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상황이었다. 5, 60년대 군복 물들여 입고다니
던 이야기... 그런 것과 지금의 시대는, 남자건 여자건 공통적으로 격세지감이
들고도 남을 옛날 일이다.
그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이따 학교로 돌아갈 일에 더 마음이 부풀었
다. 어디건 그랬겠지만, 입학식의 첫날인데도, 신입생 환영의 뒤풀이는 당연히
계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대, 그것도 숙같은 음악학과의 전통은, 그런 자리
는 으레 조인트가 되기 마련이었다. 아까 입학식장에서 만난 과 선배도 은근히
그런 말을 그녀에게 귀뜸해주었던 것이다.
조인트... 조인트라는 것은 숙이 다니는 여대에선 흔한 일이었다. 남자가 없는
과의 특성상, 무슨 이벤트나 행사가 있는 경우에는 응당 다른 학교의 남학생이
많은 과와 일종의 교류를 가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것은 으레 양쪽 모두에서 환
영을 받았다. 이제 갓 이성에 눈뜨는 시기의 선남선녀에게는 허가내놓고 이성을
만날 장이 되었고, 남자 쪽에서는 여자의 세세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에, 여자
의 입장에선 남자의 든든함이 요구되는 곳에 서로를 충당시킬 수 있었다.
조인트 미팅, 조인트 M.T, 조인트 축제... 그것이 조인트건 아니건 간에, 숙에게
는 이제는 허가된 남녀교제가 허용된 마당에서 처음 이성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랬다. 숙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가뜩이나 엄한 아버지 덕택에, 그녀는 여고시
절에도 남학생이라고는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단 한번, 남녀가 같이 다니던
독서실에서의 경우를 빼고는.
그 때의 남학생은 일방적이었다. 그의 말로는, 자기를 제외하고도 두명이나 더
숙을 좋아하고 있었다고 실토했다. 물론 같은 독서실 안에서였으며, 그 중 제비
를 뽑아 자기가 온 것이고, 그래서 같은 독서실 안에서는 자기 만이 그녀와 친구
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에 그녀는 너무나 얼떨떨한 상황일 뿐이었다. 집까
지 바래다주는 독서실의 승합버스 안에서, 그 남학생이 얘기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휭허니 내려버렸다. 다만 그녀의 옆자리에, 친구가 되고 싶다며 전
화번호를 적은 쪽지와, 작은 인형만을 남기고.
그 남학생과는 딱 한번을 더 만났을 뿐이다. 가뜩이나 남자라면 치를 떨 듯한 부
모님의 완고함에, 숙은 단지 그런 작은 만남만으로도 부담, 아니 두려움을 느꼈
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전화를 걸어 동네의 공원 벤치로 그를 불러내었
다. 그리고는, 정말로 순수한, 그러면서도 너무나 쑥맥인 대사를 그에게 들려 주
었다. 우리 집은 엄하고, 나는 공부를 해야하며, 또 남자친구 따위엔 관심이 없
노라고.
그 남학생은 벤치에 앉아 얼이 빠진 표정을 지으며 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는 단지 친구가 되자는 것이었고, 나쁜 뜻은 아니라고 강변을 했다. 그리고 심지
어는 자기 외에 다른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숙은 그 모두를 들어
주지도 않은 채 발걸음을 돌려 버렸다. 행여나, 엄마나 아빠를 아시는 분이 남학
생을 만나고 있는 자기를 볼까봐.
결국, 결말은 그보다도 훨씬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마침 그 시간에 집안 청
소를 하고있던 어머니에게 그 쪽지와 인형이 발견되고 말았었고, 집에 돌아왔을
때 쯤에는 그 사건이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로, 밤새 아버지에게 혼이 났던 그녀는, 당장 새로운 독서실로 옮겨짐을 당하
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 남학생의 얼굴은, 그 이후로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런 정도였으니, 좋은 축하의 자리에서 숙의 아버지가 하신 말 정도는 차라리
약과였다. 그렇기에, 숙은 대학생이 되었다는 설레임만으로도 이미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미팅을 나가도,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엄마 아빠는 아무 말
도 못하실 거야 -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식탁보로 가려진 레스토랑
테이블 아래에서는, 숙의 날씬한 종아리가 춤을 추듯 신나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
다.
굳이 당신의 차로 바래다 주겠다는 아버지를 말리고, 그녀가 학교앞으로 돌아왔
을 때에는, 이미 모임시간이 얼추 지나있었다. 뒷풀이가 마련된 장소는 학교 인
근의 큼직한 호프집이었다.
'환영 - OO대 XX학과 및 XX여대 음악교육과 신입생 여러분'
선배의 안내에 따라 신입생 자리로 안내되어 자리를 잡은 그녀는, 이미 전세예약
이 되어있는지, 벽에 커다란 종이 플랭카드가 붙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OO
대라... 그녀의 여대 가까이에 자리잡은 남녀공학의 대학교였다. 맞아, 아마 오
늘이 그 대학도 입학식을 하는 날이랬지...
이미 행사가 시작이 되었는지, 사회자의 인도로 몇몇 학생들이 일어나 자기소개
를 하고 있었다. 남학생들인 걸로 보아, 아마 OO대생들이 먼저 신입생 소개를 하
고있는 모양이었다.
-자, 그러면 여러분, 다음은 오늘 저희와 조인트 신입생 환영회를 갖게된 XX여대
의 음교과 새내기들입니다...!
채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와아, 휘익, 휙 -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휘파람
소리가 술집 안을 떠나갈듯 메우고 있었다. 숙이 얼핏 보니, 대부분이 남학생들
이었고, 또 전체 숫자도 많은 것으로 보아, OO대 쪽에서는 신입생 분만 아니라
선배들까지도 대거 몰려온 모양이었다.
여대에다가, 속칭 인물값들을 한다는 예체능 계열의 여학생들이라니, 특히나 남
학생들이 몰릴 만도 했다. 그 때였다. 어디에선가 500CC의 맥주잔이 그녀 앞으로
날라져 왔다.
-자자, 조용히들 하시고... 이번 XX여대의 신입생들을 위해서는, 특별히 음주신
고를 받기로 하겠습니다. 자, 그럼, 거기 앉은 새내기부터! 야아, 역시 XX여대는
틀리군요, 처음부터 미인이 나오네...!
공교롭게도, 사회자가 지목한 것은 다소 모임시간에 늦어 테이블의 맨 구석 첫머
리에 앉게 된 숙 그녀였다. 음주신고? 음주신고라니? 그녀는 어찌해야 되는 상황
인 줄 몰라 맞은 편의 선배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저... 언니, 음주신고가 뭐예요...?
-아, 음주신고... 맞아, 너희는 모르는구나. 간단해, 그 오백 원샷하고, 그다음
에 자기 소개를 하는 거야.
이 큰 잔을? 그것도 500CC라고? 숙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지금껏
마셔본 술이라고는, 시험 백일주라고 친구들과 몰래 마셔본 병맥주가 처음이었
고, 더더군다나 이렇게 큰 잔으로 마셔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만큼이
나 쑥맥, 아니 좋게 말하면 가정교육이 엄한 집에서 자랐던 것인데...!
그녀는 속으로 두근거리면서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와 같은 환성소
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예쁘다, 내가 찍었다 - 별별 이야기들이 구석구석
에서 터져 나왔다.
-저, 저는...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맞은 편의 선배 언니가 핀잔을 주었다. 먼저 마시고,
자기소개는 그 다음에 하라고 - 여자 선배들도, 말리기는 커녕, 앞장 서서 부추
기고 있었다. 그런 것이, 그녀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인 모양이었다.
숙은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500CC 생맥주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맛도 모
른 채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차가운 맥주가 알싸하게 목으로 넘
어갔다. 씁쓸한 맥주맛이 속을 울렁거리게 했지만, 이 많은 선배들이 지켜보고,
또 강요하는 마당에, 도저히 거부나 거역이란 있을 수 없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였다. 많은 남자들이 쳐다보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어
느 샌가 생맥주잔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메스꺼움을 억지로 목구멍으
로 다시 삼키는데, 이번에는 더 큰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삐익, 삑!
-야, 생긴 것도 예쁜데 술까지 잘먹네!
사방에서, 감탄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숙은, 얼떨결에 오백이나 원샷을 했
으면서도, 그런 탄성을 한몸에 받자,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소
개가 끝나자, 다시 한번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숙은 자연스레 그날의 술자리에 어울리게 되었다. 이미 조인트란
말이 무색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여대와 남학생들은, 한데 어울려 마치 같은 학
교 같은 과 사람들처럼 기분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2차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에 앉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뒷골목의 대포집으로 향했고, 이제 겨우 신입생인 숙도, 그것에 휩쓸려
어느새 자리를 잡고 눌러 앉게 되었다. 국인가 찌개인가, 안주거리가 날라져 오
더니, 이번에는 소주잔들이 놓이고 소주병이 여러개 눈앞에 놓였다.
-어디... 숙이라고 했었니?
2차의 술자리엔, 자리 구분이 따로 없이, 끼리끼리 모여앉는 분위기였다. 숙의
앞에는, 다소 날카로와 보이는 인상의 한 여자선배가 앉아 있었고, 그녀가 숙에
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예, 예...
-반갑다... 난 란이라고 해. 2학년 과대표고.
-예, 언니...
다소 차가운 인상의 선배였지만, 후리후리한 것이 꼭 남학생을 연상케 했다. 말
투도 다소 그렇게 들렸다.
-아까, 너, 원샷 잘하던데...?
-예? 아, 아니요...
-흠, 많이 마셔본 경험이 있나봐?
숙은 펄쩍 뒤었다. 무슨 잔이건, 원샷은 그 때가 처음인데.
-아, 아녀요! 저, 전 맥주도 이제 겨우 두번째 마시는 걸요...
-응? 정말? 야아, 그럼 조금만 배우면 대단하겠는데...!
숙은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학시험을 치고 나서, 집에서
아버지가 따라주신 술잔을 받아본 것이 고작이었던 그녀인 것이다.
-어이... 무슨 얘기들 해?
그때였다. 한 남학생이 그들 자리 옆으로 끼어들고 있었다.
-아, 형... 여기 우리 새내기, 숙이, 얘가 오늘 원샷은 처음 해본대.
형... 이라고 불린 그 남학생은 안경을 낀, 호남형의 인상이었다. 스스럼 없이
와앉는 것을 보니, 이미 여기의 란과는 익히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그래, 정말?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이쁜 아가씨구나!
-어유, 형은 예쁜 애들만 보면 정신을 못차린다니까. 거기 침이나 닦아요.
란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그래? 내가 그런가? 참, 여기 잔이 비었네... 자, 잔 받아.
숙의 잔이 빈 것을 알고는 그가 소주병을 따 술잔을 채웠다.
-저, 전 소주... 처음 마시는 건데...
-으잉? 정말로...? 우와, 이 아가씨 문화재네... 아니, 천연기념물이구만!
-으이그, 형은... 아차, 이 아저씨 소개 안했지? 인사해, OO대 학생회장인 석이
형이야.
란이 끼어들며, 숙에게 그를 소개시켰다.
-하하, 앞으로 자주 볼 텐데 뭘, 자, 그나저나 원샷!
석은 웃으며 건배를 제의했다. 또 원샷? 숙은 다소 망설이며 소주잔을 입에 대었
다. 맥주보다도 몇십배는 독한 쓴맛이 혀에 닿았다.
-야, 너 정말로 소주는 처음 마시나 보구나?
숙은 떨떠름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 원래 쐬주는, 잘봐, 이렇게... 눈 딱감고 목구멍으로 삼키는 거야, 자!
석은, 단숨에 자기 잔을 비우고 있었다. 숙도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목구
멍으로 억지로 술을 삼켰다.
-이야... 자알 마시는데... 어디, 한잔 더...
-형도 참... 아, 맞아, 나 잠깐 저쪽 테이블로 가있을테니까, 어린 애 너무 술
먹이지 말아요. 알았지?
-그래, 그래 알았어, 란아... 걱정 말라구.
왠지 란이 가버리자, 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숙이라고 했지... 주량이 얼마나... 아니, 소주도 오늘 처음 마신다고 했
지? 그래 그럼, 이럴 때는 끝까지 마셔보는 거야. 그럼 돼, 왜냐면 그리고나면
자기 주량을 알거든. 자!
석이란 사람은, 거푸 숙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있었다. 거의 처음 마시는 술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그는 숙의 그런 사정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자, 숙의 얼굴은 어느 틈엔가 취기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달아오른 숙을 향해, 그는 은근히 몸을 기울이며 넌지시 물었다.
-숙이... 넌 그럼 남자친구 있니...?
-나, 남자친구요? 아, 아니요...!
-그래? 정말?
-예... 전... 남자랑 이렇게 술을 마셔본 적도 없는 걸요...
그녀의 대답에, 석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러나 숙은 그런 그의 표정을 미
처 알지 못했다.
-술도 못 마셔봤다... 그럼 스킨쉽은?
-스킨쉽이요? 그게 뭔데요?
-왜 있잖아... 손잡고, 포옹하고, 입맞추는...
스킨쉽? 그런 걸 왜 이 선배가 묻지? 숙은 술기운에 알딸딸 하면서도, 그가 묻는
질문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뇨, 전혀...
-이야, 너 정말 천연 기념물이구나!
-예, 뭐라고요...?
석은, 자기가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야릇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선배님...?
-아, 아냐... 후훗...
석은 혼자 웃음을 지으며, 멎적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숙으로서는, 그가 한 말
이 뭐였는지 자세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얼마간 기분이 나빴다. 뭔지 몰라도, 그
가 혼자만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취기로 인해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잠시 피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저... 잠깐 화장실좀...
석의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잠시 찬바람을 쐬기 위해 길가에 서있
었다. 이 대포집의 화장실은, 밖으로 나와 옆 건물에 있었다. 때마침, 과 선배
하나가 그녀의 곁을 지나 대포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 언니!
-응, 숙이구나. 왜?
-저... 석이형이란 분... 우리 과 사람들이랑 친하세요?
-아, 석이형, 그래. 근데 왜?
숙은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 아닌가. 그것도 다른 학교의...
-아,아뇨... 아, 아까 란이... 언니랑 친한 것 같아서요...
-응, 란이... 맞아, 둘이 사귀는 걸. 오늘 조인트 하는 것도, 걔들 둘이 주선한
거야...!
응? 둘이 사귄다고? 애인사이?
-근데 그런 건 왜 묻니? 안에 안들어가?
-아, 예, 자, 잠깐 화장실좀...
그랬구나. 둘이 사귄다니... 그녀는 더이상 묻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까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대포집의 화장실은, 밖으로 나온 그 건물의 뒤편 어스름한 곳
에 있었다. 그녀가 막 화장실로 들어서는 무렵이었다.
-아이, 이런 곳에서 그럼 어떡해?
-괜찮아, 란아, 나 지금 못참겠단 말이야... 한번만, 한번만 봐주라, 응...
화장실 안에서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란, 란이 언니라고?
-안돼, 그, 그만해, 아, 아잉... 시, 싫어, 나, 나, 나갈거야...!
그 때였다. 그 비좁은 화장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란아, 자, 잠깐... 이, 이것만 내려봐, 부탁이라니까...
-시, 싫어, 이, 이런 데선!
그 때였다. 딸깍, 화장실의 문이 안에서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앗, 숙은 깜짝 놀
라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란아, 야!
화장실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었다. 숙이 숨은 건물 뒤는 어
두워 그들이 발견할 수 없는 위치였다.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니, 란이 서둘러 화
장실을 나와 술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한 남학생이 뒤
쫓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본 것이기는 해도, 란의 옷매무새가 헝클어져 있고,
그 뒤를 쫓는 남자는 황급히 바지춤을 추스리고 있는 광경이 숙의 시야에 들어왔
다. 그는 분명, 석은 아니었다.
이럴 수가, 방금 석이형과 란 선배는 사귀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어찌된 일이지?
그리고, 방금 화장실 안에서 란이 언니와 다른 남자가 낸 소리들은 무엇이지? 숙
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 비좁은 화장실 안에서 두 남녀가 도대체 뭘하고 있었
단 말인가? 남녀관계가 쑥맥인 그녀로서도 뭔가 낯뜨거운 상황이 벌어졌음을 짐
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못참겠다, 내려달라 - 라니, 그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
가?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남자가 석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분명 석은
저 술집 안에 있었지 않은가?
그녀는 조심스레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담배연기와 말소리가 왁짜지껄
한 그 안에서 아까 란을 따라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 갔다 오니?
자리에 다시 앉자, 이미 돌아와 있던 란이 물었다.
-예, 저, 화장... 아, 아니 잠깐 바람좀 쐬느라고 밖에...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말은 행여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자기가 그 곳에 있었음을
스스로 밝히는 꼴 아닌가. 더군다나 이 자리엔 아까 란 선배와 같이 있던 사내
대신, 애인이라는 석이 앉아 있는데. 다행히도 란은 그런 숙을 의심하지는 않고
있었다. 어느샌가, 란 그녀는 흐트러졌던 옷매무새까지 싹 고친 채로 다시 새침
떼기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숙은 그런 그녀를 보고 속으로 저으기 놀랐다. 이럴 수가, 좀 전에는 그렇게도
다급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지금 란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
를 떼고 멀정히 앉아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큰 일이다. 큰 일... 이렇게 술도 못 마시면서... 석이형!
채 그 몇분도 안되는 사이에, 지금 보니 석은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혼자서 마신 것이지 어쩐 것인지는 몰라도, 이미 두어개의 소주병이 구르고 있었
다. 란은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어휴, 이 인간... 나랑 있을 때도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마신다니까...
자기와 있을 때도 그런다... 그렇다면, 둘이 따로 만나기는 만나는 모양인데...
-괘, 괜찮을까요...?
숙은 걱정이 되어 란에게 물었다. 그러나 란은 이미 익숙한 모습인지, 이미 포기
한 눈치였다.
-걱정 마. 내버려 둬. 나하고 둘이 마실 때도 맨날 저 모양이니까. 참, 숙이 너,
M.T 갈거지?
-M.T요?
-그래, 다다음 주야. 물론, 우리끼리만 가는 건 아니구, 여기 석이형네 과랑.
M.T라... 물론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수학여행을 빼놓고, 몇년간 여행 한번도
제대로 못한 숙이었다.
-그, 글쎄요...
-가면 좋을 거야. 서해쪽으로 가니까. 물론 아직 봄이니까, 해수욕장은 안열었겠
지만... 그래도 좋잖겠니? 아무도 없는 해변이면...
그녀도 소위 대학생들의 M.T라면 익히 들어왔다. 그것도 남학생들과의 조인트 M.
T라니... 하지만 아버지가 허락할까? 무엇보다도 숙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걱정 마. 여자들끼리 가는게 그래서, 우리도 여기 OO대 애들이랑 가는 거니까.
그랬다. 조인트 M.T라면, 남학생들은 밥하고 반찬하는 자질구레한 손길을 덜을
수 있으니 좋고, 여학생들은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 대신 수십명의 짐꾼과
보디가드들을 대동하는 셈이니, 서로가 득만 있는 셈 아닌가.
-어때, 갈 거지?
-예... 가, 갈께요.
어쨌든, 이런 것에 빠지고 싶지않은 그녀였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3년을 고생하
며 대학에 온 것이 아닌가.
그 때였다. 2차의 대포집도 얼추 자리정리가 되가는 모양이었다. 돌아본 숙의 시
야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끝내는 모양인데... 우리도 나가자.
란의 제안에, 숙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석은, 그 때까지도 정신
을 못차리고 있었다.
-저, 어, 언니... 석이 선배...
-괜찮아... 놔둬도 집에 갈 정도는 되니까... 일어나, 석이형!
란이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석은 그제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마셔, 형...
-응, 란이니? 으응...
석은 란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면서도 기우뚱, 중심을 못잡고 있었다. 아마 지금
자기가 어디에 와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란아, 란아... 사랑한다...!
-어멋, 왜, 왜 이래!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그는, 자기 곁에 란이 있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아직 채
빠져나가지 않은 술집 한복판에서 석은 자기 어깨를 붙들고 있는 란을 마구 껴안
으려 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여기 후배들도 다 보잖아...!
-응, 후배? 아... 숙이... 숙이...
엉거주춤, 석에게 안긴 고개 너머로, 란이 민망한 시선으로 숙을 쳐다보았다. 숙
은,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고 먼저 대포집 밖으로 나와버렸다.
야, 3차 갈 사람! 누군가가 외치자, 이미 술집을 나선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다른 술집으로 옮기고 있었다. 숙은, 그들을 쫓아가려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
미 밤 10시가 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취기도 알달딸했거니와, 3차까지 간다면
집에 갈 시간이 너무 늦는 것 같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마지막으로 란과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석이 나왔다.
-저, 란이 언니... 저, 저 그만 갈께요...
-응, 벌써 가려구? 근데 어쩌지, 석이 형...
그녀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지금 이 남자의 상태로 보아, 3차까지 가기는 완전히
무리일 것이었다.
-언니... 랑 같이 안가세요...?
-응, 나, 나랑...?
숙의 질문에, 란은 다소 당황하는 눈치였다. 사랑한다는 사람이고, 포옹까지 하
는 사인데, 자기랑 같이 안가면 누가 간단 말인가?
-저, 저기... 어, 어디 좀 가야하는데...
-어디요? 3차 가세요...?
-아, 아니... 누구랑 야, 약속이 있어...
란은 곤란한 상황인 듯 옆에 부축된 석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제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인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10시가 넘었는데 란은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인가? 숙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사귀는 남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 시각
에 누굴 만나다니...?
-어, 어쩌지... 수, 숙아, 나 부탁 좀 들어줄래? 이 형 집이... Y동 Z아파트거
든, 길 건너가면 되니까, 미안하지만 니가 택시 좀 태워줄래? 그냥, 택시만 태우
면, 가다가 깰 거야.
Y동 Z아파트? 공교롭게도, 그곳은 숙의 집 근처였다.
-미안하다, 첨 보는 후배한테 이런 걸 시켜서... 하, 하지만 내가 좀 급하거든..
. 부탁 좀 할께, 응?
란은 그러면서도 연신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약속이 그
근처인 모양이었다. 숙은 난감했다. 아무리 집에 가는 길 근처라지만, 술에 잔뜩
취한 남자를 데리고 택시를 타다니...
-예... 아, 알겠어요...
-괜찮을 거야. 토하거나, 술주정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자, 여기...
란은 자기 지갑에서 택시비까지 꺼내주고 있었다. 선배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
는 노릇이었다.
-정말 미안하구나... 대신에, 내가 나중에 맛있는 것 사줄께. 참, Z아파트 입구
에서 바로니까, 내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갈꺼야. 알겠지?
-예... 걱정 말고 가세요, 언니...
-고마워, 숙아, 그럼 학교에서 보자...!
숙은 한숨을 쉬며, 란에게서 석의 어깨를 건네받아, 길을 건넜다. 멀지 않은 길
이기는 했지만, 서둘러 이 사내를 처리하는 것이 좋다 싶었다. 돌아보니, 이미
란은 약속장소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Y동이요, 아저씨, Y동!
그러나 숙의 예상과는 달리, 택시는 금방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숙에게
기댄 채로 석은 이미 걸음도 제대로 못걷고 있었으니, 빈 택시도 지나치기 일쑤
였다.
그렇게 Y동을 일, 이십분쯤 외쳤을까. 마침내 맘씨 좋아 보이는 기사가 빈 택시
를 세워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Y동 Z아파트요...!
기사는 백미러를 흘끔 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가씨 애인이우?
-예? 아, 아니요...
-허허... 아주 곤드레가 됐구만... 그래 아가씨처럼 이쁘장한 처녀를 놔두고 왜
혼자만 고주망태가 됐누... 쯧쯧.
숙은 다소 민망했다. 자기 남자친구도 아닌 선배의 애인을 억지로 떠맡다니...
이미 석은 뒷좌석에서 고개를 젖힌 채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좋지 않은 기
분으로 차창밖을 응시했다. 그 때였다. 학교 앞을 채 이, 삼백 미터도 못벗어나
택시가 신호등에 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창밖을 내다보던 숙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란이,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 이 때도 뒷모습만 보이고 있지만, 숙은
확신할 수 있었다 - 아까의 그 남자, 그녀와 함께 화장실에서 나온, 그 사내와
함께 길가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잠시 후 그 남자의 손에 이끌려,
란은 마지 못해 어딘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곳은 - 마침 차가 출발했지만, 숙
은 고개를 돌려 볼 수 있었다 - 못이기는 척 그녀가 들어간 건물은, 바로 여관간
판이 걸려있는 곳 아닌가!
이럴 수가! 숙은 너무나 놀라,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 남녀가 여관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
그렇다면, 그렇다면... 란은 아까 그 화장실의 남자를 만나려고? 과의 다른 사람
들은 여기 이 석과 그녀가 사귄다고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과 남
자와? 숙은 갑자기 머리가 띵해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야, 내, 내가 잘못 본거
야... 하지만, 그 뒷모습, 란의 팔을 붙잡고 여관으로 들어가던 그 모습은, 틀림
없이 아까 화장실 안에서 바지춤을 챙기며 나오던 그 사람이었다.
숙은 엄청난 사실을 목격한 것처럼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날카로운 인
상의 란 선배가... 두 남자 사이를 전전하며, 게다가 한 남자와는 여관까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어이, 아가씨. 다 왔는데... Y동 Z아파트.
가까운 거리였기에, 이미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숙은 다시
정신이 들었다.
-예, 예...
숙은 옆자리의 석을 흔들었다.
-저, 석이 선배님! 선배님!
그러나 아차, 석은 이미 완전히 골아떨어져 있었다. 좌석 뒤로 고개까지 젖힌
채, 제 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 나세요, 석이 선배님, 선배님!
-으응... 아응... 라, 란이야... 란아...
아까까지도 걸을 정도는 됐었는데, 이젠 완전히 인사불성이 된 모양으로, 도저히
아직 술이 깰 것같지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숙을 부둥켜 안으며 란이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어허... 젊은 친구가 아주 맛이 간 게구먼... 이봐, 젊은이!
숙은 운전석의 기사 보기에도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기사는 자기가 직접
석을 흔들어 깨워 보았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 어쩌지... 아저씨, 죄송합니다... 아이, 참... 선배님...!
-이럼 안되는데... 아가씨, 이 친구 집 몰라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파트 동호수라도 물어볼 것을... 자기 집 근처라고 쉽게 생
각한 것을 숙은 후회했다.
-모, 모르거든요...
-그럼 전화번호는...?
-그, 그것도요...
-허허, 그것 참... 나도 계속 영업을 해야하는데...
택시기사도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아가씨, 이 친구, 아가씨 애인 아니라고 했지?
-예, 예...
-그럼... 말이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내가 여기 어디 가까운 여관에 내려줄
테니까, 일단은 거기 눕혀두라구. 그리고나서 저 친구 지갑을 뒤져 연락처를 찾
든지, 아니면 그냥 나오든지... 알겠수?
숙은 기가 막혔다. 낯선 남자나 마찬가지의 사람과 여곤을 같이 가야하다니!
-걱정 말고, 내 말대로 해요. 보아하니 진짜 애인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아가씨도 댁에 들어가보야 할 것 아니겠수?
-그, 그래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석을 길바닥에 버려두고 갈 수도 없지 않은
가. 차라리 운전기사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어느 틈에 기사는 길가의 한 여관방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그가 직접 내려 석을
뒷자리에서 끄집어냈다.
-들어가서 재우고, 지갑따위를 뒤져봐요. 나도 이 장사 많이 해서 아는데, 아마
연락 안해도 내일 아침이면 알아서 집에 들어갈 거야.
-죄,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숙이 택시비를 지불하자, 차는 금방 떠나갔다. 이젠 선택의 방도가 없었다. 그녀
는 석의 어깨를 간신히 붙들고 끌다시피 여관문을 들어섰다.
-란이야... 란아...
그 와중에도, 석은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란을 불러대고 있었다.
술 취한 남자를 혼자 끌고 들어오는 숙을, 여관주인은 야릇한 시선으로 훑어보았
다.
-쉬었다 갈 거에요, 주무시고 갈 거에요?
-예? 쉬, 쉬었다가요?
쯧, 정말 그 의미를 몰라 묻는 숙을, 주인 아주머니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는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선불이우.
채 석을 침대 위에 눕히지도 않았는데, 주인은 방값부터 재촉했다. 숙이 간신히
요금을 지불하자, 그녀는 휙하니 방문을 닫고는 가버렸다.
숙은 이런 곳이 처음이었다. 어디 보자... 침대 위에 눕히면 되겠지... 막 쓰러
지려는 석의 신발을 벗기고, 간신히 방안으로 끌고 들어온 그녀는 그를 눕히기
위해 침대로 다가갔다.
그 때였다. 조금 전까지 완전히 널브러질 것만 같던 석이, 갑자기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는 것이었다.
-란아, 란아!
급작스런 그의 행동에, 석과 숙은 함께 보기 좋게 침대위로 같이 쓰러지고 말았
다.
-란이야, 란아...!
-왜, 왜 이래요, 꺄악!
석을 끌어다가 침대 위로 눕히려던 숙은, 엉겁결에 그의 몸 아래에 깔린 자세로
엎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던 그녀의
손이 잘못해서 벽의 스위치를 건드리고 만 것이다.
-란이, 이리 와, 란...!
-어멋, 어머멋!
아마, 석은 그곳이 밀폐된 공간인 것을 취중에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단
지 지금 란 대신 숙이 곁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숙을 란으로
차각했는지, 술냄새나는 얼굴을 드러난 숙의 목덜미에 파묻고 있었다.
-란아, 사랑해... 정말, 널 갖고 싶다...!
-저, 정신 차리세요, 선배님! 석이 선배님!
그러나 석은, 도저히 사람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불이 꺼져 어두
운 속에서, 게슴츠레 완전히 풀어진 그의 눈동자는, 뻔히 숙을 들여다 보면서도
촛점조차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란이야... 널, 널 갖게 해줘...!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석은 막무가내로 숙의 몸을 더듬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선배님, 전 숙이에요, 란 언니가 아니란 말에요!
그러나 그의 육중한 몸에 깔려, 숙은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석의 얼굴은 숫
제 그녀의 앞가슴에 파묻혀 정신없이 부벼대고 있었다. 그리고 두손은 숙의 몸
이곳저곳을 마구 더듬어갔다. 숙은 너무나 당황스런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란이, 벗어, 벗어버려, 아냐, 내가 벗겨줄께...
기가 막혔다. 이 남자는 어둠 속에서 완전히 숙을 란으로 알고 있는 모양, 헛소
리까지 지껄이고 있었다.
-어멋, 선배님! 아악!
숙은 있는 힘을 다해 석의 몸을 밀쳐내려 했지만, 석의 꼼짝도 않는 상반신은 찰
거머리처럼 그녀의 젖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술 더떠, 요동을 치는 숙의
정장 윗도리의 단추가 갑자기 투둑,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허둥버둥거리던 그의
손들이 어느새 숙의 허리를 안더니, 등뒤로 돌아와 그녀의 엉덩이를 쥐고 주무르
기 시작했다.
-안돼, 이번만큼은, 널, 널 가질 거야! 널, 널!
-아악, 선배님, 난 란이 언니가 아니란 말에요!
원래 술취한 사람은 보통 때보다 곱절은 힘이 세지는 법이다. 가뜩이나 여자인
숙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고, 또 밀어내려 했지만,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그 때
였다. 석이 벌떡 허리를 일으키더니 갑자기 하체로 그녀의 몸을 타누르기 시작했
다.
-에이, X할! 안돼! 오늘은 꼭 널 갖고 말겠어! 안그러면 죽일 거야!
숙의 몸 위에 걸터앉은 자세의 석은, 갑자기 두손으로 그녀의 윗도리를 잡아쥐었
다. 투두둑! 숙의 윗도리가 블라우스 단추까지 순식간에 뜯어졌다.
-죽여버릴 꺼야! 란이, 란이 널 오늘 갖고 말겠어!
-아악, 이러지 마세요! 선배님, 전 숙이라고요!
석의 얼굴은 드러난 숙의 앞가슴의 맨살 위로 다시금 내려꽂히듯이 파묻히고 있
었다. 그의 뺨과 입술은, 정신없이 브래지어만으로 가려진 숙의 유방 위를 유린
하고 있었다. 숙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틀어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기가 막혔
다. 남자의 완력이란 이다지도 강한 것이었단 말인가. 숙은 죽여버린다는 그의
외침에 겁이 더럭 났다.
-거짓말하지 마, 난 정말, 널 갖고 싶어...!
-거짓말이 아녜요, 아흑, 전 숙이란 말에요, 선배님!
숙은 너무나 두려운 이 상황에 더럭 겁이 났다. 안돼! 이럼 안돼요! 그녀는 태어
나서 처음 남자의 완력을 당해보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앗!
그러나 그녀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지, 석의 힘은 더욱 강하게 그녀의 몸을 타누
르며, 두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놀란 숙은 고토을 채 느낄 수
도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
면 브래지어까지 뜯겨져나갈 판국이었다.
-선배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전 언니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의 저항에는 아랑곳없이, 역한 술냄새를 풍기는 석의 입술은 이제 거의 밖으
로 삐져나오기 일보직전인 숙의 유방 위를 더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악다
구니에 정신이 들었던 것일까, 갑자기 그의 하체가 조금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그 틈을 타 숙은 재빨리 석의 허벅지에 눌려있던 팔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상체를 밀쳐내려한 것도 잠시, 숙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께를 타누르던 석의 하체가 일순 그녀의 허벅지께
로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숙의 치마는 그의 양손에 의해 확
들쳐올려져 끌어올려진 것이다.
-어머낫, 뭐하시는 거에요! 악, 안돼!
숙의 손이 자유로워져 그를 채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치마자락을 남김없이 올
린 석의 손은, 무방비로 드러난 숙의 하체 위로 옮겨져 그녀의 팬티스타킹을 끌
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넌, 넌 내 꺼야!
-무슨 짓이야! 선배! 선배님!
스타킹의 얇은 올들이 쭈욱,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은 다급하게 한손으
로 석의 상체를 밀어내며 다른 한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선배님!
그녀는 최대한 허리를 틀며 빠져나오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다잡아쥔 석의 손아
귀는 이제 숫제 그녀의 팬티마저 스타킹과 함께 붙잡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말
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숙의 하얀 팬티는 어느새 허벅지께까지 내려지려
하고 있었다. 숙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그의 손을 제지하려 했지만, 불가항력적
인 그의 손길에 어느새 숙의 팬티는 자꾸만 벗겨지고 있었다.
-너의 이곳, 이곳을 가질 거야!
-아악, 안돼요! 석이 선배님!
숙의 팬티 끝자락이 내려져, 어둠 속에서 허연 아랫배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
다. 거의 그녀의 음모가 노출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녀의 뽀얀 하복부의 듬성하
게 짙은 수풀이 언뜻 드러나고 있었다. 숙의 부끄러운 부분이 유린당하기 일보직
전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숙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숙의 사타구니가 거의 절
반 이상 드러나자, 만취상태의 석은 이미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한 모양인
지,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하복부에 고개를 처박았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막 드
러난 숙의 곱슬한 음모에 비벼지기 시작한 무렵, 그녀에게는 유일한 기회가 생겼
던 것이다. 다름아니라, 석의 입술이 그녀의 샅을 점령하기 위해 숙여진 순간,
숙의 버둥대던 다리를 누르고 있던 그의 하체가 다소 헐거워진 것니다.
숙은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재빨리 다리를 들어올려, 석의 어
깨를 자신의 발과 손으로 최대한 힘을 주어 밀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막 목적지까지의 한치도 못되는 수풀까지 도달했던 석의 입은, 이 순식간의
반격에 억,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숙의 죽을 힘을 다한 필사의 노력은, 그의
몸을 거의 허공에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 쿵, 소리와 함께 석의 몸은 완전
히 뒤로 제껴진 채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이후의 일은 너무나도 경황이 없어, 숙에게도 정신 없던 순간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옷가지를 챙기고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는 여관
을 빠져나와 몇십분인가를 정신없이 도망쳤다. 석이 쫓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
다.
그렇게 족히 1킬로미터는 달렸던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있건 없건,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10여분쯤 달렸을까. 도저히 숨이 턱에
받혀 주저앉을 정도가 되서야, 숙은 길가의 전봇대를 짚고서 숨을 돌릴 수 있었
다. 마치 숨을 안쉬고 달려온 것만 같았다. 허리를 굽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시야에, 그제서야 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먼저 자기의 다리가 보였다. 아직도 후들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다행
히도, 구두는 신고 있었다. 대신 스타킹은 거의 종아리부터 허벅지에 걸쳐 올이
나가 있었다. 그제서야 숙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큰 길가여서,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구멍가게나,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간간
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숙은 그 모두가 문제가 아니었다. 소리내어 엉엉 울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뿐이었다. 닭똥같은 눈물이 여기저기 긁힌 구두 발치에 뚝
뚝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아니 기가 막힌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차라리 허
허 웃고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도 학교에 처음 신입생으
로 들어간 첫날, 다른 사람도 아닌 선배의 남자친구에 의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따질 수도 없었다. 숙은 그
렇게 한참동안을 길거리에서 울었다.
어쨌든 집으로는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도망쳐온 쪽은 집으로 가는 방
향이었다. 한동안 울다가 허리를 들고 옷가지들을 살폈다. 절반 이상 뜯겨진 스
타킹이야 그렇다고 쳐도, 입학축하 선물로 엄마가 사준 정장과 블라우스는 엉망
이었다. 구겨진 것은 둘째치고, 우선 블라우스 단추가 반이상 뜯겨지고 없었다.
윗도리 자켓의 단추도 두개중 하나가 행방불명이었다.
옷 뿐만이 아니었다. 기를 쓰고 저항했던 탓에, 갑자기 긴장이 풀린 몸의 구석구
석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사방이 멍투성이인 것 같았다.
이런 상황으로 택시를 타거나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조금 먼길이기는 했어도,
차라리 눈에 안띄는 어둑한 길가를 걷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가끔식 마주쳐 지
나는 행인들이 흘끔흘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오늘 아까 여관방에서 당
한 수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절뚝거리며 걷는 동안에도, 쉼 없이 숙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다행히 보
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당한 일이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얼굴도 못들고
학교를 다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이 가까워오자, 숙은 골목 모퉁이에서 한참을 쉬었다. 이렇게 엉망이 된 모습
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눈물도 잠시 동안은 - 그녀의 방에 들
어가기 전까지는 - 거두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매무새를 부모님께 들킬 수
는 없었다.
우선, 사람이 안보는 곳에서 살짝 치마 속으로 손을 넣고 스타킹을 벗어 쓰레기
통에 버렸다. 아마 아무리 여자인 어머니도 자기 딸이 스타킹을 신었었는지 벗었
었는지까진 기억을 못할 것이란 기대였다. 상의는 대충 옷자락을 당겨 뜯겨진 단
추부근을 가렸다. 그리고 손으로 앞자락을 부여잡고 들어선다면, 아마 아무도 알
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가만히 보니 치마속이 엉망이었는데, 숙이 입고있던 팬티
는 꼭 화장실에서 제대로 안올리고 온 사람모양 자신의 엉덩이 절반께까지 끌어
내려진 채 간신히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랴. 그곳은 최소한 겉으
로 드러나는 부분은 아니었다.
숙은 다시 한번 눈물자국을 잘 닦은 뒤 쉼호흡을 했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는
척해야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들통이 난다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질
것은 뻔했다. 그렇게되면 아무리 둘러댄다고 하여도, 더 큰 엄청난 거짓말을, 현
재의 그녀로서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고, 집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드리자마자 곧장 방에 들어
오기까지, 그 두방망이질치는 몇십초가 숙에게는 수십 수백년처럼 길게 느껴졌
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긴 이후였다.
-저녀석,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지금이 몇신데.
-아이고, 내버려둬요. 그랬잖아요, 오늘 신입생 환영회 한다구...
아마 아버지는 아직 잠들지 않고 그녀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안
방에 불려가 한바탕 난리를 치르며 훈계를 받았을 테지만, 다행히도 어머니가 막
아주고 있었다. 숙은 그날따라 그토록 엄마가 고마울 수 없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집안은 곧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숙은 방문을 잠그고 실컷 울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당혹스럽고, 또 치욕스러웠다. 사실 육체적인 의
미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었지만, 숙에게는 처음 겪어본 남자의 완
력이었고, 또한 일생 처음 겪을 뻔 했던 남자의 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 깨닫게 된 것이다. 얼추 책과 호기심으로 남자란, 아니 남자의 성욕
이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몸소 겪을 수 있던 경험은 오늘 밤이 최초
였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주간지에서나 들어본 남녀관계 - 그것도 여자 선배와
그 남자친구를 통해 - 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일단 그녀가 울음이 잦아들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밤새 뜯어졌던 옷단추를 달아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옷장 안에 걸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겨진 부
분을 보이지 않도록 다림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끝난 다음에야, 숙
은 씻을 생각도 못한 채 지쳐 잠이 들어 버렸다.
관련자료
-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