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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씨름판은 김민재 시대…‘천하장사’의 유래는 [홍윤표의 휘뚜루마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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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토도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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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씨름협회가 2027년으로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이는 전조선씨름협회가 창설된 1927년 11월 27일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씨름협회는 체육(체조) 교사였던 강낙원, 서상천, 한진희, 강진구 등이 뜻을 모아 결성했고, 창립하던 해 12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동안 경성 종로청년회관(현 YMCA)에서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여태껏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는 1929년 9월 5, 6일 휘문고보에서 열었던 것으로 여기저기에 유포돼 있었으나 이번에 ‘씨름 100년사 편찬팀’이 당시 동아일보 등 보도를 검색한 결과 1927년으로 확인됐다.

동아일보 1927년 12월 9일 치 예고기사에 따르면, 제1회 조선씨름대회를 종로청년회관 주최, 동아일보 운동부 후원으로 “경성의 복판인 종로에서 개최케 되었다”고 알렸다. 우리네 전통 씨름이 근대적인 경기의 꼴을 갖추고 최초로 열었던 대회가 바로 전조선씨름대회였다.

흔히 힘센 이를 일컬어 ‘장사’라고 한다. 작가 황석영은 ‘장사의 꿈’이라는 소설에서 “줄다리기도 좋고, 투석도 좋지만 나는 씨름판에 나서는 게 제일 신나더라. 앞에 떠억 버티고 선 놈이 어떻게나 정다워지는지 몰라. 샅바를 잡고 어깨를 비빌 때엔 피차가 가려운 곳, 아픈 곳, 쑤시는 데를 먼저 알아내는 게 중요하단 말이지. 제 몸이 되어야 하지. ‘아라랏차차차……’ 하면서 알아챈 상대방의 그곳으로 파고 들어가지. 그 고함의 신명나고 소름끼치게 즐거운 울림이 귀에 쟁쟁하구만.”

씨름 장면을 이처럼 깊이 있고 실감 나게 묘사한 그의 글솜씨야 새삼 일러 무엇하리오. 그렇다면, ‘장사’라는 호칭은 언제부터 상용화된 것일까.

8‧ 15 해방 이후 씨름은 1959년 한국일보사가 창간 5주년을 기념해 대한씨름협회 주관으로 개최한 제1회 전국장사씨름대회가 큰 성황을 이루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일보사는 단오절과 개천절을 전후해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씨름대회를 기획했고, 이를 연례행사로 열기로 했다. 제1회 대회는 그해 중앙청 앞 광장에 특설 경기장을 마련해 6월 24일부터 7월 2일까지 8일 동안 매일 오후 7시부터 야간경기로 치렀다. 이 대회는 ‘왼씨름(현행 통용)’을 공식적으로 표방, 경기 방식의 통일을 꾀했고, 호남 일대에서 주로 했던 ‘바른씨름’은 고교생 대항 번외 경기로 열었다.

특이한 점은 대회 우승자 이름에 사상 처음으로 ‘장사(壯士)’를 내세운 것이다. 개인전 왼씨름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고, 장사의 칭호를 부여했다. 선수들의 실력에 따라 ‘장사’를 정점으로 ‘장군’과 ‘선수’로 등급을 매겼다. 그 이후 씨름판에서 우승한 씨름꾼에게 ‘장사’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니게 됐다.

대회 초대 장사 칭호는 16전 전승으로 우승한 23세의 경북 김천 출신 김기수에게 돌아갔다. 관중들의 열기에 고무된 한국일보사는 같은 해 10월 10일부터 제2회 대회(추계대회)를 열었고 10월 16일 거인(214cm) 씨름꾼 김용주가 우승, 부상으로 황소 두 마리를 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에게 천하장사 친필 휘호를 내렸고, 그 글씨를 그대로 받아 제작한 ‘천하장사’의 우승기를 김용주가 품에 안았다. ‘천하장사’라는 칭호가 우승자에게 붙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씨름은 ‘프로화’ 기치를 내걸고 치른 제1회 천하장사 대회(1983년 4월 17일) 이후 모래판의 달인 이만기를 정점으로 한 이른바 ‘3이(李)’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시대에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융성했고 백승일⟶강호동, 황대웅⟶이태현을 거치면서 차츰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24년 1월 4일, 천하장사 두 차례 우승자 황대웅이 58세의 젊은 나이로 재활병원 옥상에서 추락사한 것은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의 돌연한 죽음은 민속씨름의 무상한 시대 변천을 절감케 함과 아울러 프로씨름 2세대가 온전히 떠나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황대웅이 1991년 3월 25일 제21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천하장사에 오르던 날은, ‘천하’의 이만기가 은퇴, 세대교체를 극명하게 드러냈던 날이기도 했다. 개그맨으로 변신한 강호동과 현역 시절 쌍벽을 이루었던 황대웅은 백승일(3차례 천하장사 우승)에 이어 호남 출신(전남 장성)으론 상징적인 씨름꾼이었다. 그는 천하장사 2차례, 백두장사 6차례 이름을 얻었고 민속씨름 출범 이후 최초 300승, 500판 돌파(1998년 1월 29일)의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황대웅의 개인 통산 전적은 501전 329승, 172패로 아직도 그의 최다 경기 출전과 최다승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2025년 씨름대회를 총결산하는 ‘위더스제약 2025 의성 천하장사 씨름 대축제’(11월 29일. 의성종합체육관)에서 천하장사 2연패를 달성한 김민재(23. 영암군민속씨름단)는 그동안 큰 씨름꾼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렸던 씨름계의 단비와 같은 존재다. 김민재는 2025년에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3개 대회(2025 설날· 추석· 천하장사)에서 정상에 섰고, 개인 통산 17번째 장사 트로피(백두장사 14회· 천하장사 3회)를 들어 올렸다. 만약 시즌 중간에 부상만 없었더라면 최중량급에서 독무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김민재의 등장은, 장기간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씨름판이 활기를 되찾을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좋겠다.

2002년생인 김민재는 2022년까지 울산대에 몸담고 있다가 2023년부터 영암씨름단 소속으로 뛰고 있다. 김민재는 이미 울산대 2학년 때인 2022년에 강릉 단오대회 백두급 우승에 이어 한해를 총결산하는 천하장사 대회에서도 일약 천하장사 칭호를 얻어 두각을 나타냈다.

김민재는  민속씨름 개인 통산 125전 112승 13패(승률 89.6%)를 기록, 고교시절부터 경쟁 관계였던 최성민(200전 139승 59패, 승률 69.5%)과 견주어도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김민재의 급성장은, 마치 40여 년 전 이만기(63)의 등장 과정을 보는 듯하다. 이만기는 경남대 3학년 때인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에서 민속씨름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치른 제1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쟁쟁한 고수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초대 천하장사로 탄생했다.

굳이 지역을 들먹이기는 뭣하지만, 영암군 인근의 장흥 태생인 김민재가 상대적으로 귀한 호남 큰 씨름꾼의 맥을 잇는 장사로서 영, 호남 균형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고무적이다.

참고삼아 역대 민속씨름 우승 경력을 살펴보면 천하장사 대회 우승 횟수를 우선순위로 놓으면, 이만기가 독보적이다. 이만기는 통산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 등 공식 타이틀만 35차례나 손에 거머쥐었다. 그다음으로 이태현 23회(천하 3+ 백두급 20)이고, 김민재가 벌써 17회(천하장사 3+ 백두급 14)로 머지않아 이태현을 넘어설 태세다. 강호동은 비록 활동 기간이 짧았으나 천하장사 대회만 5차례 우승했고, 백두급도 7차례 정상에 올랐다. 이준희와 백승일도 천하장사 소리를 3번씩 들었다.

김민재의 득세(得勢)는 씨름판의 유전(流轉)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민속씨름은 한 시대가 다시 가고, 이제 김민재가 맨 앞에서 이끄는, 다른 인걸(人傑)의 시대가 왔다.

글.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 대한씨름협회 제공

원문: 바로가기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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